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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
송암 박두성 선생

송암 박두성 선생은 1888년 4월 26일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에서 박기만 씨의 9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두 동생과 함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고, 후에는 강화도에 있는 보창학교를 거쳐 1906년 9월 10일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졸업, 그 다음날인 1906년 9월 11일 양현동 보통학교 부교원에 임명되었다. 이어 1907년 6월 22일에 어의동보통학교 부교원 서판임관 7급으로 임명되어 6년 4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제생원 맹아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경성보통학교 교장회의에서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기독교인 한 사람을 추천하도록 의뢰한 결과, 기독교인인 박두성을 추천하여 그가 24세 때인 1913년 1월 6일 제생원 맹아부 훈도로 발령받아 맹교육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제생원 맹아부 교사 시절 그는, 수입과 지출을 정확하게 계산해야 맹인들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산을 열심히 가르쳤고, 일본인 교사들의 일본점자 수업시간에 들어가 통역을 하다가 일본점자일람표를 보고 연구하면서 점자도 가르쳤다. 제생원 맹아부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쳤는데 점차 일반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자, 일본인 교사들은 조선어를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박두성은 조선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어만을 배워 '나는 진지를 잡수시고, 아버지는 밥을 먹는다'고 말한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이냐고 하면서 조선어를 가르칠 것을 주장하여 계속 가르칠 수 있었다.


일본인 교사 네모토 가이조가 해부대요 시간에 일본말을 모르는 1학년 학생에게 ‘젠토오코스(전두골)’, ‘오토오코스(후두골)’ 등 어려운 전문용어를 일본어로 가르쳐서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형편이었으므로, 이를 본 박두성은 해부학을 직접 배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그는 사감으로 맹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담당하면서, 식사시간에는 수저 바로 잡기를 가르치고, 자세가 바르지 못한 맹학생에게 바른 자세를 가르치는 등 일상생활 교육에도 힘썼다.


이러한 가운데 앞을 못 보는 맹학생에게 한글점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신념아래 1923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3·2점자를 창안하였다. 그러나 이 점자가 부적합하여, 1926년에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창안하여 우리나라 맹교육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22년 동안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근무하면서 점자연구와 출판 보급에 주력하다가 1935년 3월 48세로 퇴직하였다.


그 후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인천영화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도 계속 점자성경 출판과 점자도서 개발에 헌신했다. 1940년 이후에는 인천 율목동 25번지에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설립하여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자 통신교육을 실시하였고, 주간 회람지 (촉불)을 발간하여 읽게 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도 실명 상이용사의 재활교육에 힘썼다. 1955년부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시 점역하여 1957년에 신 ·구약 성경전서 점역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박두성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 8월 15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는 국민포장 (문화포장)을 수여하였다. 그 후 지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점자 출판사업을 계속하다가 1963년 8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인천시 수산동 모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