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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 기고] 문학의 숨비소리: 제3화 위대한 손 성스러운 손 - 시, ‘변소 푸는 날’을 읽고 (손병걸)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11-15 오전 10:44:49

조회수 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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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 기고] 문학의 숨비소리: 제3화 위대한 손 성스러운 손 - 시, ‘변소 푸는 날’을 읽고 (손병걸)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11-15 오전 10:44:49 (조회 : 2267)
제3화 위대한 손 성스러운 손 - , ‘변소 푸는 날을 읽고
손병걸 시인
 
  주인 할머니가 변소를 쳐내
  나는 막걸리를 받아 왔다
 
  막걸리 냈다고 할머니는
  세곡리 잔칫집에서 얻어 온
  돼지 혓바닥 삶았다
 
  김이 설설 오르는데
  먼저 알고 달려드는 파리
  탁 때려잡고 설죽은 건
  엄지로 꾹 눌러 비빈 뒤 그 손으로
  고기 한 점 소금 찍어 주신다
 
  이쪽 요만큼은 간인디
  돼지 간이라도 뜨거울 땐 먹을만햐
 
  밥 푸는 것처럼
  변소 밑바닥까지 휘저어
  채소밭 골고루 거름 얹고
  담배 한 대 피워 물면 그만
 
  똥이나 파리나
  당신 손에선 더러울 것 없어
  그 손 알아보는지
 
  푸성귀도 짐승들도
  뽀얀 살이 오른다
 
  - 최은숙 시인의 시, ‘변소 푸는 날전문 -
  
  모든 소생은 버려지는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듯 만물의 이치는 소생의 연속이다. 이 순간에도 돌아온 것들은 또 버려지고 어디론가 돌아간다. 그러므로 정해 놓은 것이나 정해야 할 것도 반드시 제자리인 것이 없다. 쉬운 말로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스스로 돌지 못하는 것들은 누군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야만 한다. 이를테면,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이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가장 건강한 만물의 이치가 바로 서게 되고 모든 생명이 생태적 삶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 시를 읽어보자. 인간이 배설한 배설물이 자연을 살찌우고 자연은 다시 수확물을 통해 인간을 살려 놓는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문장이 푸성귀도 짐승들도/뽀얀 살이 오른다라는 마지막 두 행이다. 시에서 인간들을 대표 비유한 할머니가 키워낸 짐승들과 푸성귀는 인간들을 살찌운다. 생명이 다른 생명을 키우는 것이다.
  가령, 짐승들은 인간들을 위해 고기나 가죽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푸성귀들은 인간들을 위해 푸르스름한 참살이를 제공해 준다. 모든 동식물의 죽음이 다시 동식물 또는, 인간들의 생을 이어준다. 이를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하며, 과학에서는 원자의 재구성이라고 한다. 모든 생명은 끝내는 썩는다. 여기서 썩는다는 의미는 죽음이고 생명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윤회의 단계 또는, 원자의 재구성 단계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배설물을 식물들에게 거름으로 제공한다.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다. 썩는 모든 것이 거름이 된다. 새싹은 세상에 와서 돌아가는 과정에 있는 거름이 키운 결과이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시킨 거름의 메타포가 새싹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 숨 쉬는 모든 생명은 인다라망처럼 연결된 것이고, 동물이든 식물이든 태어나 죽음에 이르는 동안 혼자서 산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더구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위 시에 거론한 똥냄새처럼 지상의 것들이 악취를 풍기며 썩는다는 것은 참, 고맙고도 다행한 일이다. 요즘은 썩지 않아 심각한 것들이 많다. 그 내용을 담은 시도 다음 기회에 소개하고 싶다.
  아무튼, 자연과 자연의 연결 고리로 위 시에서는 할머니의 삶이 있다. 할머니는 한 손으로 파리도 잡고, 돼지 간을 집어 주고, 똥도 푼다.
  이 시를 통해 돌아보자. 우리는 마치 자신이 가장 깨끗한 것처럼 한 톨의 먼지도 화들짝 털며 살지는 않았는가? 자신이 배설한 배설물에 코를 틀어쥐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가? 대답이 떳떳하지 못하다면 자연적 삶과는 먼 삶이다.
  우리는 파릇파릇한 참살이를 실천하자면서 자연은 왜 훼손하는가? 자연과 자연이 노래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목소리는 높은데, 왜 행동은 반대로 하고 있는가? 그러나 보라, 할머니는 변소마저도 밥 푸듯이 휘휘 저어 밑바닥까지 긁어 자연을 살찌운다. 그야말로 할머니의 삶이 경이롭지 않은가?
  이 시가 정말 좋은 시인 것은 자연을 살찌운다는 할머니의 모습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물질적 소유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저 세곡리 잔칫집에서 돼지고기 몇 덩어리 담은 비닐봉지를 허리춤에 매달고 꼬부랑 걸음으로 집을 향했을 것이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변소에 가득한 똥으로 텃밭에 덜 자란 어린 푸성귀들에게 거름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할머니가 살아가는 일상이고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한 삶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할머니의 삶이 가이아의 여신처럼 위대하고 성스럽게 보인다고 말이다.
  * 편집자 주: ‘메타포는 숨겨서 비유하는 은유법. ‘인다라망은 부처가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

(2019. 11. 15. 제10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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