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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느 오래된 작은 것에 대하여 (배다은)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10-31 오전 11:17:01

조회수 816

게시물 내용
제목 어느 오래된 작은 것에 대하여 (배다은)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10-31 오전 11:17:01 (조회 : 816)
어느 오래된 작은 것에 대하여
 
배다은(교사)
 
  퇴근길에 우편함을 보니 봉투 하나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봉투 일부가 투명한 셀로판지로 되어 있으면 고지서이겠거니 하고 부모님 보시게 탁자 위에 던져 놓는데 제법 도톰한 봉투 너머에서 느껴지는 올록볼록한 촉감이 수신자를 짐작케 하는 우편물이라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뜯어보았다.
  시기가 시기이다보니 발신인과 내용은 대충 짐작 가능했고, 그것이 맞았음을 확인하고는 점자기념일 행사의 일시, 장소 등만을 훑어 내리고는 곧장 폐휴지통에 넣고 잊어버렸다.
  며칠 후, 독서 모임에 갔다가 어떤 언니가 토론 주제 도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읽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듣고, 그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1cm도 되지 않는 손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더듬는 일은 얼마나 귀찮고 지난한 일인가...
  ‘세발 강아지라는 소설이 있다. 다리가 셋 뿐인 강아지가 고난과 역경을 딛고 훌륭한 어미개가 된다는 동화인데 그 책을 생각할 때마다 엄지와 중지를 있는 힘껏 펼쳐도 다 가릴 수 없었던 두터운 책등이 떠오른다. 책등에 찍힌 약간은 날깃날깃해진 점자 세발 강아지’... 동생과 함께 쓰던 작은 방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귤 물 묻은 손을 땅바닥에 쓰윽 쓰윽 문대어 가며 읽던 그 책... 25년 전 읽은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한 촉감과 기억들이 바로 점자에 대한 내 유년 시절의 대표 이미지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각종 아동도서 전집을 사면 끼워 주는 오디오 테이프 이외에 독서수단이 전무했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각종 점자책들을 빌려 읽을 수 있어 여가 시간이 무척 풍요로워졌다. 점자들은 한 글자 한 글자 쌀알처럼 쌓여 마음의 양식이 되었고, 그때 읽은 책들은 토씨 한 글자조차도 소중히 오래오래 남았다.
  컴퓨터를 배우고 난 후, 청독(聽讀)의 삶이 시작되었다. 학교가고 밥 먹고 잠자는 이외의 모든 시간은 컴퓨터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게임이나 채팅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즐겼던 활동은 단연코 독서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치 주인공이 나에게 이야기하듯 음성지원이 되어 책 속 세상에 쉽게 빠질 수 있었다. 게다가 속도가 빨라서 점자책을 읽을 때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한 권을 끝낼 수 있어 성취감 또한 높았다. 점자의 사용은 자연스럽게 학교에서의 시간으로 제한되었고, 나의 청소년기에 점자에 대한 대표 이미지는 공부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철철이 치러야 했던 중간고사, 기말고사, 3 수능, 고배를 마셨던 첫 임용시험까지도 정성스럽게 작성한 답안은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점자 답안지였다. 외국인과의 감정적 교류가 있는 멋진 해외여행을 꿈꾸며 도전했던 영어공부도 점자로 했고, 소중한 사람에게 쓰는 편지도 정성껏 손점자로 썼다.
  그런데 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왠지 모르게 바빠졌고, 4차 산업혁명의 주역 중 하나인 스마트폰은 여가시간을 좀벌레처럼 갉아먹었다. 이젠 간단한 메모 작성이나, 수업시간에 교재를 볼 때 이외에 점자를 만질 일이 없다. 그것도 오랜 시간을 견디며 순하고 나직해진 종이 위의 점자가 아니라 기계만 잘 교체해 주면 영원히 선명한 점자정보단말기의 차갑고 뾰족한 점자만이 남았다.
  그날 토론 주제 도서를 손으로 읽었다는 그 언니의 이야기가 오래 오래 가슴에 남았던 건, 25년 전 세발 강아지의 두터운 책등에 찍힌 날깃날깃한 점자가 그리워졌던 건, 손편지에 세 줄 혹은 네 줄마다 넣는 절취선을 아무생각 없이 오래 오래 찍고 싶어졌던 건 갑자기 무엇 때문이었을까?
 
(2019. 11. 1. 제10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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