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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기고] 그땐 그랬지: 안마업의 역사, 그리고 낭만과 추억 (이진규)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10-02 오전 10: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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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기고] 그땐 그랬지: 안마업의 역사, 그리고 낭만과 추억 (이진규)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10-02 오전 10:55:03 (조회 : 827)
안마업의 역사, 그리고 낭만과 추억
 
이진규
 
  사람은 누구나 몸의 어디가 아프면 손부터 가서 문지르고 주무르고 매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안마는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몸의 어디가 아프거나 저리거나 결릴 때 본능적으로 손이 가는 동작으로부터 발전하고 진화하여 현재의 수기요법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라 하겠다.
그 수기요법에 가장 적합한 손 중의 손이 시각장애인의 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평생 눈 대신 손을 써서 온갖 것을 만져서 인지하고 판단해 온 손이기 때문이다. 그 손에는 가장 섬세하고 예민하고 초감각적인 기능이 이미 장착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안마술에 보사부령 자격증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은 196312월부터였다. 그 몇 년 뒤, 안마시술소를 개설신고서라는 타이틀로 내주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한국 최초로 개설한 원조 안마시술소는 서울시 중구 을지로 중앙극장 건너편의 제일안마시술소였다. 병원을 하던 3층 건물을 매입하여 개업한 제일안마시술소의 개설자는 지금 전북 완주군에서 사랑의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최용진 시각장애 목사였고, 운영은 주로 그의 부친이신 최덕규 장로님이 하셨다. 시설은 자그마한 욕실과 열 개 남짓의 시술실이 다였고, 종업원들도 전부 남자들이어서 지금처럼 퇴폐적인 영업과는 전혀 무관했고, 지극히 모범적이라는 평가였다. 그리하여 안마사라면 누구나 그 업소에 취직하기를 소망하리만큼 한때 그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렇게 제일안마시술소 한 곳만 고고하게 굴러가던 중, 1970년대 중반에 들면서 안마시술소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서울맹학교 전신인 제생원을 나오신 B씨가 청와대 앞에다 개설한 온천안마시술소를 시작으로 안마시술소는 들불처럼 일기 시작했으나, 그 온천안마시술소를 기화로 영업 행태가 완전히 뒤바뀌어 퇴폐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로부터 문을 여는 업소마다 젊은 아가씨를 종업원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사회의 지탄을 받는 불법 업소로 낙인이 찍혔고, 지금은 많이 그 기세가 쇠락했으나,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시술소다.
  그런 영업 형태에 최초로 불씨를 붙이고 불을 키운 B씨가 핑계로 하던 말이 웃긴다.
  “찾아오는 손님한테 맨밥만 드리면 쓰나? 국도 드려야지.”
  애초에 B씨가 시작한 그 영업 행태는 숱한 단속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야 어디로 흘러가든 80, 90년대를 젊은 나이로 살았던 시각장애인 세대에게는 그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적잖은 부를 쌓는 기회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차리면 차리는 족족 성공이다 보니, 여자 안마사가 모자라서 재학 중인 학생까지 데려다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80, 90년대를 한국 안마계의 최대 황금기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영업주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호랑이 등에 업혀 가는 심경이었음도 불문가지다.
  시술소 외의 다른 영업 형태로는 방 한두 개에다 달랑 전화기 한 대를 놓고 여관이나 소규모 호텔을 상대로 출장안마를 주업으로 하는 업종도 성행했는데, 안마를 불러주는 업소에다 건당 얼마씩을 떼 주는 안마원 간의 리베이트 경쟁이 횡행했었던 것도 그 무렵의 풍경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60, 70세대의 시각장애인들은 초기 안마계의 전환기와 격동기를 무수히 이겨 내고 헤쳐 나온 한 시대의 역군들로 불릴 만하리라.
  그 무렵, 안마시술소가 서울만 해도 150개나 되었고, 전국적으로는 천여 개에 이르렀으니, 실로 안마업의 최고 부흥기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서울에 50, 전국적으로 400개에 불과하다 하니 상당히 쇠락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안마의 본연의 모습인 안마원이 서울에 170여 곳, 전국적으로는 천여 곳에 이른다고 하니, 우리 삶의 근간인 안마가 비로소 백년대계의 초석을 제대로 쌓으며 나아가는 듯하여 마음 든든하다. 그동안 성매매 업소라는 추명을 완전히 벗어내고, 본연의 길로 정진하는 모습이 참으로 반갑거니와, 바야흐로 시술소보다 안마원 개점률이 나날이 상승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치 긴 장마 끝에 반짝 갠 하늘을 보듯 청쾌하다.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시각장애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오면 주로 모여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동네가 거의 4대문 안인 종로구나 중구로 한정되다시피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안마사들이 근무할 시술소나 호텔이나 사우나가 대부분 4대문 안에 밀집해 있어서 근무처와 가까운 곳에다 주거지를 정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남대문시장 건너편인 회현동에 모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기도 했다. 주거하는 주택이 비록 초라한 적산 가옥이었을망정 한때 한 교정에서 선후배로 얽혔던 인연들이 사회에서 다시 만나,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고, 어쩌다 사돈으로 맺어지기도 하며, 크고 작은 애경사까지 챙겨 주며 세월의 강을 함께 건너던 풍경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오늘 우리 아들 백일일세. 한 잔 하러 오게.”
  사흘이 멀다 하고 이런저런 경사들로 가가호호 돌며 온정을 주고받으며 지내던 젊은 날들도 어느새 아득한 추억으로 가물댄다.
  한때 우리의 텃밭이던 안마계도 어느 결에 우리의 살핌을 떠나고 안마밭을 뒤적거리던 우리의 몸도 손도 어느새 낡고 마모되어, 이젠 뒤켠으로 밀려난 이방인이로구나.
 
(2019. 10. 1. 제10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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