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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 기고] 문학의 숨비소리 제1화 김삿갓문학관을 찾아서 (손병걸)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09-11 오전 9: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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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 기고] 문학의 숨비소리 제1화 김삿갓문학관을 찾아서 (손병걸)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09-11 오전 9:37:13 (조회 : 861)
1화 김삿갓문학관을 찾아서 - 시와 시인의 삶을 통한 시대의 이야기
 
손병걸(시인)
 
  우리는 시인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 시대를 알 수 있다. 오늘 문학기행을 나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승합차 안에서 한 시인이 말했다. “나는 방랑 시인 김삿갓을 알고 있기는 한데, 그의 시편들과 그의 삶을 표피적으로 알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한 시인이 대답했다. “오늘은 그의 삶과 그가 쓴 시를 제대로 느껴 봅시다.” 그때, 여러 시인이 박수로 화답했다.
  승합차는 어찌어찌 영월군 소재 김삿갓문학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삿갓으로 유명한 방랑시인의 문학관이어서일까? 입구의 지붕이 천연슬레이트로 올린 삿갓지붕 모양이었다.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이고,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해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고 불렸다. 본관은 안동이고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이고, 아버지는 안근으로 그는 안근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19세기에 조정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안동 김 씨로 그가 태어날 적에 그의 집안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 익순은 높은 벼슬을 하다가 그가 다섯 살 적에 평안도의 선천 부사로 나가 있었다. 그런데 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면서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서북인들에 대한 차별과 김 씨 세도 정권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홍경래의 농민군은 거병한 지 10일 만에 가산, 곽산, 정주, 선천 등 이북의 10여 개 지역을 점령했다. 가산군수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칼을 맞아 죽었는데 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몸을 재빨리 피했다. 그 후, 김익순은 농민군에게 잡혀 직함을 받기도 하고 또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가 잡혔을 적에 그 목을 일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려 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다.
  삿갓은 역적의 자손이어서 법에 따라 죽임을 당하거나 종이 될 운명에 처했으나, 안동 김 씨들의 비호로 죄는 김익순에게만 묻고 종이 되는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삿갓의 어머니는 남달리 영민한 둘째 아들 병연을 서당에 다니게 했다. 어린 병연은 열심히 공부했고 스무 살이 되자 지방 향시에 나갔다. 시제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였다. 병연은 자신 있게 시를 써 내려갔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임금을 잃은 이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병연은 장원급제했고 어머니에게 자랑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옛일을 감출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병연은 방황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물두 살에 장가를 들게 했다. 그러나 병연은 아들을 본 뒤에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가족과의 이별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쓴 삿갓 때문에 김삿갓으로 불린 삿갓은 팔도강산을 종횡무진 떠돌아다니며 방랑자 생활을 했다. 당연히 몰골이 천한 걸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받아온 양반 교육이 그의 풍모에 드러났다. 그는 3년 만에 집에 돌아와 둘째 아들을 낳기까지 머물다가 다시 방랑의 길에 들어섰다. 그 후, 1863년 전라도 동복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줄곧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나선 삿갓의 첫째 아들 익균이 선친을 강원도 영월에 모셨다.
  삿갓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팔도 곳곳을 누볐다. 어느 때는 한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거기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문장으로 소리를 높여 사대부들의 악덕과 사회의 폐해를 풍자하여 듣는 이의 동조를 끌어내는 격조 높은 노래와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었다. 그는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호탕하게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조롱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표현을 했다. 이것은 일반 민중이 그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한 마디로 삿갓의 삶은 그 자체가 시였다. 그렇다. 그는 서민들에게는 웃음을 주고 틀린 세상을 풍자하며 시를 지었다. 팔도를 돌아다닌 그의 시 곳곳에는 큰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세상에 펼쳐 보이지 못한 그의 아픔이 있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등사상이 담긴 정의로운 정신이 있었다. 우리가 가장 한국적인 시인을 뽑아야 한다면 그 자리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자리일 것이다.
 
(2019. 9. 15. 제10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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