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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어릴 적 추석은 (천병은)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09-11 오전 9:31:29

조회수 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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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어릴 적 추석은 (천병은)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09-11 오전 9:31:29 (조회 : 845)
내 어릴 적 추석은
 
천병은(소설 작가)
 
  울긋불긋 천연색으로 그림 그려진 당시 국민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붉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나무가 눈길을 끌어당겼다.
  ‘감도 익어 갑니다. 밤도 익어 갑니다. 즐거운 추석이 옵니다.’ 동심을 한껏 부풀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목이었다. 다른 집만큼 생활이 넉넉지 않았어도, 그래서 명절 준비로 집안 전체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어도 동심은 그저 명절이란 것 하나로 마음이 들떴다.
  “이놈에 명절은 어쩌자고 이렇게 자주 닥쳐오는지 모르겄네. 그 어떤 놈이 명절이란 것을 만들어서 이라고 없이 사는 사람들 속을 바짝바짝 태우는지 모르겄다.”
  엄마의 마음은 내 마음과 달랐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늘 하던 말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반복했다. 어쩜 엄마 말대로 명절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엄마의 한숨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조각달은 몸집을 불려 보름달로 성장했고, 휘영청 밝고 커진 달에서 우린 방아 찧는 토끼 그림자를 찾느라 눈망울을 굴렸다.
  엄마는 부엌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시퍼렇게 녹이 슨 놋그릇이며 대바구니들을 닦았다. 곱게 빻은 기왓장 가루를 묻힌 지푸라기 뭉치가 수차례 오가면서 그것들은 차츰 제 모습을 찾아 갔다. 거뭇한 대바구니는 노란빛으로 다시 새것이 되었고, 놋그릇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제사상에 귀빈으로 초청 받은 조기 서너 마리는 지푸라기에 가지런히 엮여 마당 빨랫줄에 내걸렸다. 군데군데 찢기고 구멍 난 창호지는 물을 뿌려 뜯어내고 새것으로 발랐다.
  외지로 일 나간 가족을 맞이하는 집들마다 분위기는 한층 더 들떴고,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크고 작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이 집 저 집에서 피어나는 웃음소리며 얘기 소리는 온갖 음식 냄새와 뒤섞여 동네 골목을 가득 채웠다. 새 옷을 얻어 입지 못해도 좋았다.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 입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새 검정 고무신을 얻어 신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다.
  “밀가루로 만든 거라 그래야.”
  채반에 받쳐 앞 집 지붕에 널어놓은 송편 색이 누렇게 변해 가는 것이 궁금해 묻자 되돌아 온 엄마의 대답이었다. 다른 집 쌀 송편은 말라 가도 여전히 흰색인 것이 그렇게나 부러웠다.
  “느그 아버지가 선주한테 밀린 월급 받으러 갔다가 허탕 치고 왔다는디 어짜겄냐. 그거라도 감지덕지한 줄 알아라.”
  아버지가 야속했다. 한숨까지 버무려 얘기하는 엄마의 말에도 상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나이테가 하나, 둘 늘어 가고 철이란 게 찾아들면서 그날 엄마의 한숨은 우리한 아픔으로 가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들어앉아 버렸다.
  시대는 좋아져 우린 지금 차고 넘쳐 나는 먹을거리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거리들마다 때깔 좋은 의상들의 행렬은 흡사 패션쇼를 보는 듯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그야말로 1년 내내 명절인 것만 같다.
  나이 들어서까지도 나는 어머니란 호칭보다 엄마라 부르는 걸 더 선호한다. 이맘때면 무슨 병에 걸리기라도 한 듯 더욱 더 엄마가 그립다.
 
(2019. 9. 15. 제10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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