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길을 잃다
조승리(회사원)
책을 읽다 길을 잃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종종 길을 잃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은 복잡한 골목길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합니다. 또 묘사가 생생한 문장 앞에서 저는 책을 덮어버리고 눈을 감습니다. 그런 날이면 더 이상의 문장 산책은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책은 나를 어디로든 데려다 주고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은 소설가 윤대녕 씨의 성산포 묘사를 되풀이해 읽었습니다. 낚시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중년의 사나이와 그가 딛고 서 있는 검은 바위를 그의 시선이 가 닿는 오렌지빛 하늘과 지평선에 반쯤 걸친 태양을 하염없이 그리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검은 바위 위에 서 있었습니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꿈일 거라고, 내 망상이 빚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다는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내 발밑까지 밀려왔습니다. 그의 문장은 형상을 만들고 파도가 되어 내게 밀려들었습니다. 지금도 성산포까지의 여정을 명확히 기억해 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몽유병 환자처럼 시작됩니다. 그리고 낯선 이방에서 화들짝 깨어나게 합니다. 나의 여행은 동경과 무모함과 당혹스러움 없이 불가능한 순례입니다.
밤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집니다. 스웨터와 하루키를 꺼내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을은 하루키의 계절입니다. 나는 매해 하루키와 가을을 맞이합니다. 그의 문장에는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책을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그의 문장에 한 번 중독되면 헤어나기란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니 내가 오모태산도의 골목을 헤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하루키의 산책로를 걸으며 그의 일상을 흉내 냅니다. 상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들여다보고 대형 간판과 안내소만한 파출소를 지나 카페 다이보에 들어갑니다. 나는 하루키의 자리에 앉아 하루키처럼 진한 커피를 주문하고 새로운 여행지를 찾는 공상에 빠집니다. 어느새 해 뜨는 나라에도 밤은 찾아옵니다.
나는 색채가 없는 쓸쓸한 도시를 떠돌다 거대한 빛의 기둥 앞에 섰습니다. 도쿄타워는 텅 빈 도시에서 홀로 등을 꼿꼿이 세우고 늠름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릴리 프랭키의 말처럼 도쿄타워는 쓸쓸해서 더 동경할 수밖에 없는 동경의 중심이었습니다. 도쿄타워는 해 뜨는 나라의 밤에 뜨는 태양이었습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시모키타자와입니다. 작은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골목을 만들고 거리에 배어 있는 맛있는 냄새가 젊은이들의 활기와 뒤섞여 흥겨움을 만들어 냅니다. 일본의 대표 여류 작가인 요시모토 바나나 씨는 일본에서 가장 마음을 달래주는 장소를 시모키타자와라고 소개합니다. 거리에 들어찬 생동감이 여행자의 지친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바람은 상점마다 내 걸린 깃발들을 흔들고 나를 아사쿠사의 입구까지 밀어 놓고 갑니다. 나는 옛 가옥들의 틈에서 길을 잃고 두리번거립니다. 그때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녀는 분명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 여사입니다. 나는 여사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을 때마다 아사쿠사를 찾습니다. 여사님의 추리 소설 속 아사쿠사는 만물상으로 변화합니다. 나는 부지런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지만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여사님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지 나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윽고 여사님은 커다란 등이 걸린 대문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아사쿠사의 입구입니다. 나도 곧이어 문턱을 넘습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인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 자욱한 안갯속에서도 잘도 보이는지 나를 스쳐 지나갑니다. 나는 이 순례의 마지막 종착지로 향합니다. 아사쿠사의 거대한 화로 앞은 액운을 쫓아 준다는 연기를 맡기 위한 순례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들 사이에 미야베 여사님도 있습니다. 나도 그녀의 옆에서 합장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시작된 여행은 거짓말처럼 끝나고 맙니다.
거실 오디오에서는 스메타나의 교향곡 나의 조국이 반복재생 되고 있습니다.나는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봄볕 아래서 카프카를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라하의 황금 소로와 바칠라프 광장을 상상합니다. 나의 동경이 무모함으로 발전하는 순간 나는 프라하에서 길을 잃고 새로운 순례를 시작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