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은 삶의 동반자
본지가 11월에 시행한 점자새소식 40주년 이벤트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글입니다.
최명남(주부)
“할머니? 초성이 뭐야?”
손녀가 묻는다. 얘가 생뚱맞게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보았다.
“여기 종성은 또 뭐야?” 하고 묻는 아이를 향해 나는 퉁명스레 말한다.
“흥. 오늘따라 웬 관심?”
나의 이런 모양새가 우스웠던지 아이는 배시시 웃으면서
“여기 쓰여 있어.” 하고 내 손에 책을 쥐여 준다.
내가 조금 전에 읽은 점자 소식지였다. 뭔가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에 점자 일람표를 뚫어져라 쏘아 본다. 간단하게 한 줄만 점자 표기였대도 여태껏 모르지 않았을 텐데... 께름칙한 기분이 왠지 우롱당한 느낌이다.
이 소식지를 구독하는 사람 중 ‘비단 나 한사람뿐 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무려 십여 년을 한 점 한 점 나름 꼼꼼하게 읽었다고 자부해 왔었다. 하지만 가끔은 앞장 첫머리에 점자 일람표를 표기해 주어도 좋을 텐데...하고 생각했었다.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겉표지에 인쇄가 돼 있는 줄 모른 채 말이다.
아이는 겉표지 글자들을 내 손으로 짚어가며 또박, 또박 읽어준다. 앞면은 점자새소식. 그리고 뒷면에 초성, 종성... 순간 꼭꼭 숨어있다 들켜버린 아이처럼 수런수런 글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아이가 알고 싶어 하는 여섯 개의 점으로 글자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의외로 얌전하게 앉아서 듣고 있던 아이가 말했다.
, 또박 읽어준다. 앞면은 점자새소식. 그리고 뒷면에 초성, 종성... 순간 꼭꼭 숨어있다 들켜버린 아이처럼 수런수런 글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아이가 알고 싶어 하는 여섯 개의 점으로 글자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의외로 얌전하게 앉아서 듣고 있던 아이가 말했다.
“아아, 알았다. 알았어.” 하며,
“모음은 아, 야, 어, 여...” 하고 주절대다 말고,
“약어는 또 뭐야?” 하고 아양스레 묻는다.
“응. 점을 줄여서 쉽고 편하게 읽고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글.” 이라고 대답하자,
“에이, 점자가 어렵다더니 쉽네 뭐.”
아이가 책을 들고 신둥신둥 웃어가며 말한다.
“‘사’는 점이 나란히 세 개, 그래서 사. 사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으니까 ‘옹’이 된다.” 그러면,
“옹은 쌍둥이야. 쌍둥이.” 하고 깔깔댄다.
아이는 퍼즐 맞추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고 신이 나서 쉴 새 없이 조잘대더니,
“할머니. 이것 좀 봐. 점이 팔 하나만 들고 워워 하네. 발을 벌리니까 와와.”
재미있다. ‘울’ 자는 더 재미있는 모양 같다는 기발한 이론에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와아. 내 손녀 최고다.”
아이의 놀라운 재치와 상상에 헤벌쭉 벌어진 내 입에서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오래도록 이 아이가 지금처럼 밝은 웃음을 가진 사람, 이름만 들어도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어주길 염원하면서. 내 마음은 맑아진다. 밤새 내리던 비가 멎은 아침처럼, 시원하게 눈앞을 흘러간다.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시련과 싸워가며 쓴맛도 겪어야 했던 지난날들이...
인생 참 덧없다. 칭얼대는 아기를 등에 업고 동동거렸던 갓난쟁이, 그 아이가 어느새 열 살이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이 녹아든 세월을 붙잡고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세상을 다 얻은 만큼이나 행복하다. 한낮의 햇살이 방안 가득 내려앉는다.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힘들게 배운 한 점 한 점은 나만의 소중한 자산이요, 내 남은 삶의 동반자로 오늘도 가을빛 곱게 물든 점을 손끝으로 만져가며 점자 소식지를 읽어간다. 내게 남은 예쁜 삶이 되고자... 그래도 웃음이 가득 담겨 있으면 하고 바란다. 소소해도 좋다. 아이와, 가족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한 줄의 글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