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할머니
조승리(회사원)
노파와의 인연은 내가 나물 바구니를 둘러엎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입구 인도에 봄이면 나물과 야채 좌판이 섰다. 그 당시 홀로 보행이 익숙지 않았던 나는 그만 나물 바구니를 홀랑 뒤집어엎고 말았다. 처음 겪는 일에 당혹감과 난처함이야 이루 말할 것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매섭게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더듬으며 나물을 주웠다. 곳곳에서 동정 어린 시선들이 따갑게 날아들었다. 나는 창피함과 당혹스러움에 목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가씨! 됐으니 그냥 가!”
나물 주인으로 보이는 노파의 성난 목소리가 꽃샘추위만큼이나 싸늘했다. 나는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러자 노파의 목소리도 차츰 풀려 갔다.
“그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그럴 수 있지! 괜찮으니 어서 들어가!”
나는 편치 않은 마음에 내가 둘러엎은 나물을 사겠다 했다. 노파는 억지로 그럴 것 없다 하셨다. 나는 노파의 손에 돈을 쥐여 주듯 하며 나물을 사서 돌아왔다. 나물은 내 복잡한 마음처럼 씻어도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안 보이는 게 죄지!”
나는 억울하고 서러워 개수대 앞에 서서 눈시울을 붉혔다.
다음 날 나는 조심스럽게 좌판 앞을 지나갔다. 또다시 실수로 나물 바구니를 엎을까 봐 어찌나 긴장하고 걸었는지 한걸음이 십 리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때 나물 파는 노파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 왔다.
“잘 다녀오시게.”
나는 멋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퇴근길에도 다음 날에도 노파는 대수롭지 않은 말을 건네 왔다. 그렇게 한두 마디씩 건네던 사이 노파와 나는 이웃이 되었다. 나는 철마다 노파가 지고 나오는 광주리의 야채를 사서 식탁을 꾸렸다. 몇 해가 지나자 노파와 나는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어 근황을 주고받거나 팔다 남은 야채를 싸게 받기도 하고 냉커피나 미숫가루를 타다 드리기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노파는 이른 봄부터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직접 기른 야채를 내다 팔았는데 나는 노파가 길에 나오시면 비로소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노파와 정이 깊어질수록 나는 노인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 이른 봄이면 온종일 길가에 서서 어린 새순처럼 추위에 바들바들 떨어야 했고 여름철이면 긴 장마에 좌판을 걷었다 펼치기를 반복해야 했다. 또 해가 나면 나는 대로 노파는 따가운 햇볕에 새빨갛게 익어가면서도 팔리는 야채보다 시들어 버리는 야채를 더 걱정하며 분무기로 야채에 물을 뿌렸다. 찬바람이 분다 해서 노인의 고생은 줄지 않았다. 가을이면 노인은 소득이 없을 겨울을 어찌 날지 시름해야 했다. 더구나 노인에게는 봉양해야 할 아픈 아들이 있었다. 노파의 딱한 사정은 나의 어두운 현실과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야채를 샀고 자주 떨이 야채를 팔아주었다. 그러나 혼자서 소비하는 야채의 양은 정해져 있었다. 남은 야채는 냉장고에서 상해가거나 피클이나 장아찌가 되어 냉장실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지출 비용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노파는 좌판 앞을 지나칠 적이면 내게 야채를 떠맡기듯 쥐여 주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또 어느 날은 끝이 무르기 시작한 야채를, 비들하게 마른 나물을 싸게 주는 것이라며 인심 쓰듯 안겨 왔다. 노파는 내 연민을 당신의 장삿속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마음이 배신당한 것처럼 괘씸해졌다.
‘궁핍한 처지가 불쌍해 어떻게든 도우려 했거늘.’
고얀 마음은 좀처럼 달래지지 않았다. 나는 노파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먼 길을 돌아 집으로 향했다. 또 어쩌다 노파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올봄, 노파는 라일락이 만개할 때까지 좌판을 펼치지 않았다. 노파의 자리는 일회성 장사꾼들이 간혹 좌판을 펼칠 뿐 공터처럼 비어있었다. 나는 더는 노파를 피해 먼 길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한 야채를 강매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허전함은 다시 걱정으로 걱정은 다시 죄책감으로 뭉쳐져 가슴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노파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파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서야 뒤늦게 좌판을 펼쳤다. 노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이의 목소리는 한층 더 주름진 듯 갈라지고 팍팍해져 있었다.
“아가씨 오랜만이네. 이따 퇴근할 때 야채 좀 들여가!”
나는 그러겠다 약속하고 출근을 서둘렀다.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싶었다. 약속대로 나는 퇴근길에 노파에게 들러 야채를 샀다. 노파는 기다렸다는 듯 남은 야채를 몽땅 안기려 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아욱만 한 봉지 사서 돌아왔다. 나는 더는 노파를 피하지 않았고 노파가 끈질긴 호객꾼처럼 달라붙어도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리고 이사를 앞둔 전날, 나는 마지막으로 노파에게 야채를 샀다. 노파는 아니나 다를까 내게 떨이라며 남은 야채를 몽땅 떠맡기려 했다. 나는 기꺼이 야채를 떠맡기로 했다. 노파에게 만 원짜리 두어 장을 내밀고 건강하시라 인사를 했다. 노파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좌판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야채 봉투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사실 내가 향한 곳은 음식물 수거함이었다. 나는 음식물 수거함에 들고 온 야채를 쏟아 버리고 돌아섰다. 내가 버린 것은 연민으로 포장한 싸구려 동정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기침처럼 튀어나왔다. 내 장애를 동정하는 이들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는가! 그런 내가 노파를 동정하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메마른 웃음소리가 내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