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꺼이 시대에 뒤떨어지기를 선택한다
(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 원윤선)
이 사람 손에서 까꿍, 저 사람 핸드백 속에서도 까꿍. 음식점에 앉아 있어도 까꿍, 회의실이나 세미나장에서도 까꿍까꿍. 무슨 일일까? 여기저기서 까꿍까꿍이라니.
7, 8년 혹은 10년쯤 전이었나,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까꿍거리며 다닌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알고 봤더니 까궁이 아니라 ‘카톡’이었다. 별로 이쁘지 않은 만화 캐릭터의 목소리, 예컨대 일곱 난쟁이 중의 하나이거나 개구리왕자 같은 목소리로 ‘까똑까똑’ 하는 거였다. 기계나 기술발달에 별 관심 없고 특히 정보기술혁신에 발 빠르게 움직일 의사가 그다지 없는 나는, 그때까지 카톡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정보기술의 보급이 우리나라보다 다소 더딘 미국에 살고 있던 터라 더 그랬다. 몇 해가 지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까똑거리는 소리는 더욱 빈번하다. 한국에서는 시각장애인들도 다 카톡을 하고 있었다. 내게도 카톡을 열라고 성화들이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보니, 무슨 단톡에 들어오라, 어디 단톡에 들어오라 난리 아닌 난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카톡 없이는 불편해서 일상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한 날이 온다면 할 수 없겠지만, 그 외의 이유로 내가 카톡을 여는 일은 없으리라.
우리나라에 휴대폰이 선보인 게 20여 년 됐나 그 후 빠르게 보급되어 5~6년이 지났을 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을 지녔고, 초등학교 아이들도 그것을 노련히 다루고 있었다. 가족들, 친구들 모두 입을 모아 다그친다. 빨리 휴대폰 사라고. 그즈음 7만 원인가 8만 원인가 거의 공짜로 휴대폰을 보급하고 있었지만, 전혀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직장인도, 사업가도 아니었으니까. 그 당시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을 돌보느라 거의 집을 지키는 나에게 때르릉 부르면 신복처럼 달려가 받들어 들게 하는 집 전화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완전자동시스템으로 작동하는 내 몸과 팔다리. 밥 먹다가도 잠시 피곤하여 누웠다가도 혹 깊이 잠들었다가도 때르릉 한 마디면 족하다. 이유 불문하고 내 몸은 벌떡 일어나 그 소리에 복종한다. 좀 자존심 상하지 않나? 제까짓게 무엇이기에 만물의 영장을 이토록 복종하게 만드나? 어릴 때 엄마 말씀을 이렇게 잘 들었더라면 이 땅에 효녀났다 하지 않았겠는가? 날더러 이런 폭군 같은 주인을 한 분 더 모시라고? “Oh, no, 전혀 원치 않아” 그랬다. 하지만 머지않아 굴복하고 말았다. 그것 없이는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어딘가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려면, 특히 남산산책로를 걷다가 집에 돌아오려면 복지콜을 불러야 하는데, 그때 휴대폰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시각장애인의 이동을 위해 복지콜은 거의 절대적이고, 복지콜 신청을 위해 휴대폰은 필수품이 되고 말았다. 난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내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기에 기꺼이 휴대폰을 소유했다.
카카오톡도 마찬가지다. 카톡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삶을 도저히 영위하지 못할 날이 오지 않은 한 절대 내 핸드백 속에서 까똑거리는 소리가 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단체가 있었다. 1여 년 모임을 갖고 같이 활동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단톡방을 열겠단다. 거기서 회의도 하고 모든 정보도 공유한단다. 조용히 나는 떠나려 했다. 거의 모든 의사소통을 카톡을 통해 하겠다는 모임에 굳이 남고 싶지 않아서다. 목소리 듣고 안부도 물을 겸 전화해서 몇 마디 나누면 될 것을 왜 굳이 목소리도 없고 표정도 애매한 문자로만 소통하겠다는 건지.
물론 단체 카톡의 편의성은 분명히 있다. 일일이 통화하는 수고를 덜고, 바로 통화가 되지 않을 때 기억했다 다시 걸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빠르고 정확하고 분명 효율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 정확성, 효율성만으로 충분할까? 수학적 계산만으로 우리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가 너무 현명하게 계산하는 동안 놓치고 있는 무엇이 있진 않을까?
‘접촉’ 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한다. ‘사회적’ 이란 단어에는 ‘관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관계는 접촉을 통해서 형성된다. 이 ‘접촉’ 은 물리적 접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정서적, 언어적, 모든 형태의 접촉을 아우르는 단어라 하겠다. 에둘러 말할 게 없다. 인간은 만나고, 부대끼고, 부비고, 대화하고, 때로는 다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더 축약하면, 만남과 대화라는 접촉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인생이란 뜻이다. 카톡을 포함한 모든 디지털 대화에는 접촉이 없다. 디지털 접촉도 접촉이 아니냐고 우길 사람도 있겠으나, 접촉에는 체온이 있다. 접촉에는 향기가 있다. 접촉에는 표정이 있다. 매끈한 스마트폰 스크린과 키보드의 딱딱한 글판 위에 생기 있는 무엇이 있는가? 어떤 온기가 있는가? 나는 도저히 느낄 수 없다.
나는 거부한다. 접촉이 없는, 체온도, 체취도 없는 차가운 디지털 대화를.
현대인은 모든 접촉의 기회를 디지털 토크라는 괴물에게 잠식당하고 있는 듯하다. 만나서 악수하거나 어깨를 톡톡 치며 장난하고 농담할 기회도, 눈빛으로 뜻을 전달하고 고개를 끄덕여 공감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순간도, 심지어 전화 송수화기를 통해 인사를 주고받는 목소리의 접촉까지도 포기하고 그 괴물에게 다 갖다 바친다.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모든 접촉의 기회를 포기하고 우리 손에 남은 건 스마트폰 액정 위에 무수히 떠도는 공허한 획의 집합들뿐 아닌가?
난 주소나 은행계좌번호 등의 정보전달 외의 목적으로 문자메시지를 쓰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문자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나 지인에게 나는 때르릉 전화를 걸어 한 마디 던진다. 전화 걸어 혓바닥 몇 번 움직이면 완성될 이 한 문장을 위해 액정 위를 무수히 두드려댔을 손가락의 비효율성에 대하여.
카톡을 무척 즐기시고 여러 단톡에 가입되어 열심히 활동하시는, 고희를 바라보는 어떤 어르신께서 최근에 내게 이런 조언을 하셨다. “카톡을 빨리 열어서 모모 단톡에도 가입하고 부지런히 활동해야지. 좋은 정보도 많아. 요즘은 카톡을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니까? 원 선생은 시대에 뒤쳐지고 싶은 거야?”
카톡을 비롯한 디지털 토크의 효용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시는 이 분께, 앞에서 말한 나의 구구절절한 생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웃으며, “아아, 네에.” 라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론 이렇게 대답했다. “카톡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시대에 뒤쳐짐을 의미하는 거라면, 나는 기꺼이 시대에 뒤떨어지기를 선택합니다.”
온라인상에는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태평양이라도 메울 듯 넘쳐난다. 개중에 우리 지식과 상식을 넓히고 생활을 유익하게 하는 좋은 정보들이 적지 않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실과 무관한, 오히려 위험한 쓰레기 정보가 부지기수로 혼재하고 있음도 다 아는 일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수용한 정보는 오히려 흉기가 될 수 있다. 그 둘 사이를 잘 분별할 능력이 부족한 나는, 차라리 정보에 뒤쳐지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기를 선택하고, 디지털 토크의 현명함보다는 느리고 굼뜬 만남과 접촉의 아날로그를 선택하는 것이다.
7, 8년 혹은 10년쯤 전이었나,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까꿍거리며 다닌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알고 봤더니 까궁이 아니라 ‘카톡’이었다. 별로 이쁘지 않은 만화 캐릭터의 목소리, 예컨대 일곱 난쟁이 중의 하나이거나 개구리왕자 같은 목소리로 ‘까똑까똑’ 하는 거였다. 기계나 기술발달에 별 관심 없고 특히 정보기술혁신에 발 빠르게 움직일 의사가 그다지 없는 나는, 그때까지 카톡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정보기술의 보급이 우리나라보다 다소 더딘 미국에 살고 있던 터라 더 그랬다. 몇 해가 지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까똑거리는 소리는 더욱 빈번하다. 한국에서는 시각장애인들도 다 카톡을 하고 있었다. 내게도 카톡을 열라고 성화들이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보니, 무슨 단톡에 들어오라, 어디 단톡에 들어오라 난리 아닌 난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카톡 없이는 불편해서 일상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한 날이 온다면 할 수 없겠지만, 그 외의 이유로 내가 카톡을 여는 일은 없으리라.
우리나라에 휴대폰이 선보인 게 20여 년 됐나 그 후 빠르게 보급되어 5~6년이 지났을 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을 지녔고, 초등학교 아이들도 그것을 노련히 다루고 있었다. 가족들, 친구들 모두 입을 모아 다그친다. 빨리 휴대폰 사라고. 그즈음 7만 원인가 8만 원인가 거의 공짜로 휴대폰을 보급하고 있었지만, 전혀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직장인도, 사업가도 아니었으니까. 그 당시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을 돌보느라 거의 집을 지키는 나에게 때르릉 부르면 신복처럼 달려가 받들어 들게 하는 집 전화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완전자동시스템으로 작동하는 내 몸과 팔다리. 밥 먹다가도 잠시 피곤하여 누웠다가도 혹 깊이 잠들었다가도 때르릉 한 마디면 족하다. 이유 불문하고 내 몸은 벌떡 일어나 그 소리에 복종한다. 좀 자존심 상하지 않나? 제까짓게 무엇이기에 만물의 영장을 이토록 복종하게 만드나? 어릴 때 엄마 말씀을 이렇게 잘 들었더라면 이 땅에 효녀났다 하지 않았겠는가? 날더러 이런 폭군 같은 주인을 한 분 더 모시라고? “Oh, no, 전혀 원치 않아” 그랬다. 하지만 머지않아 굴복하고 말았다. 그것 없이는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어딘가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려면, 특히 남산산책로를 걷다가 집에 돌아오려면 복지콜을 불러야 하는데, 그때 휴대폰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시각장애인의 이동을 위해 복지콜은 거의 절대적이고, 복지콜 신청을 위해 휴대폰은 필수품이 되고 말았다. 난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내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기에 기꺼이 휴대폰을 소유했다.
카카오톡도 마찬가지다. 카톡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삶을 도저히 영위하지 못할 날이 오지 않은 한 절대 내 핸드백 속에서 까똑거리는 소리가 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단체가 있었다. 1여 년 모임을 갖고 같이 활동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단톡방을 열겠단다. 거기서 회의도 하고 모든 정보도 공유한단다. 조용히 나는 떠나려 했다. 거의 모든 의사소통을 카톡을 통해 하겠다는 모임에 굳이 남고 싶지 않아서다. 목소리 듣고 안부도 물을 겸 전화해서 몇 마디 나누면 될 것을 왜 굳이 목소리도 없고 표정도 애매한 문자로만 소통하겠다는 건지.
물론 단체 카톡의 편의성은 분명히 있다. 일일이 통화하는 수고를 덜고, 바로 통화가 되지 않을 때 기억했다 다시 걸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빠르고 정확하고 분명 효율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 정확성, 효율성만으로 충분할까? 수학적 계산만으로 우리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가 너무 현명하게 계산하는 동안 놓치고 있는 무엇이 있진 않을까?
‘접촉’ 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한다. ‘사회적’ 이란 단어에는 ‘관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관계는 접촉을 통해서 형성된다. 이 ‘접촉’ 은 물리적 접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정서적, 언어적, 모든 형태의 접촉을 아우르는 단어라 하겠다. 에둘러 말할 게 없다. 인간은 만나고, 부대끼고, 부비고, 대화하고, 때로는 다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더 축약하면, 만남과 대화라는 접촉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인생이란 뜻이다. 카톡을 포함한 모든 디지털 대화에는 접촉이 없다. 디지털 접촉도 접촉이 아니냐고 우길 사람도 있겠으나, 접촉에는 체온이 있다. 접촉에는 향기가 있다. 접촉에는 표정이 있다. 매끈한 스마트폰 스크린과 키보드의 딱딱한 글판 위에 생기 있는 무엇이 있는가? 어떤 온기가 있는가? 나는 도저히 느낄 수 없다.
나는 거부한다. 접촉이 없는, 체온도, 체취도 없는 차가운 디지털 대화를.
현대인은 모든 접촉의 기회를 디지털 토크라는 괴물에게 잠식당하고 있는 듯하다. 만나서 악수하거나 어깨를 톡톡 치며 장난하고 농담할 기회도, 눈빛으로 뜻을 전달하고 고개를 끄덕여 공감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순간도, 심지어 전화 송수화기를 통해 인사를 주고받는 목소리의 접촉까지도 포기하고 그 괴물에게 다 갖다 바친다.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모든 접촉의 기회를 포기하고 우리 손에 남은 건 스마트폰 액정 위에 무수히 떠도는 공허한 획의 집합들뿐 아닌가?
난 주소나 은행계좌번호 등의 정보전달 외의 목적으로 문자메시지를 쓰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문자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나 지인에게 나는 때르릉 전화를 걸어 한 마디 던진다. 전화 걸어 혓바닥 몇 번 움직이면 완성될 이 한 문장을 위해 액정 위를 무수히 두드려댔을 손가락의 비효율성에 대하여.
카톡을 무척 즐기시고 여러 단톡에 가입되어 열심히 활동하시는, 고희를 바라보는 어떤 어르신께서 최근에 내게 이런 조언을 하셨다. “카톡을 빨리 열어서 모모 단톡에도 가입하고 부지런히 활동해야지. 좋은 정보도 많아. 요즘은 카톡을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니까? 원 선생은 시대에 뒤쳐지고 싶은 거야?”
카톡을 비롯한 디지털 토크의 효용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시는 이 분께, 앞에서 말한 나의 구구절절한 생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웃으며, “아아, 네에.” 라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론 이렇게 대답했다. “카톡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시대에 뒤쳐짐을 의미하는 거라면, 나는 기꺼이 시대에 뒤떨어지기를 선택합니다.”
온라인상에는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태평양이라도 메울 듯 넘쳐난다. 개중에 우리 지식과 상식을 넓히고 생활을 유익하게 하는 좋은 정보들이 적지 않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실과 무관한, 오히려 위험한 쓰레기 정보가 부지기수로 혼재하고 있음도 다 아는 일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수용한 정보는 오히려 흉기가 될 수 있다. 그 둘 사이를 잘 분별할 능력이 부족한 나는, 차라리 정보에 뒤쳐지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기를 선택하고, 디지털 토크의 현명함보다는 느리고 굼뜬 만남과 접촉의 아날로그를 선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