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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느림을 그리워하며(원윤선)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8-11-30 오후 1:56:05

조회수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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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느림을 그리워하며(원윤선)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8-11-30 오후 1:56:05 (조회 : 1532)
느림을 그리워하며
원윤선
  단톡방(카카오톡 대화방), 밴드, 페이스북 등등 회원 전체의 관심도를 높이고 자유로운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어느 쪽이 좋을지 논의 중이다. 모두들 꽤나 진지하다. 회원 수가 수십 명이 넘는 규모의 단체일 경우 카톡은 이러이러한 점이 불편하고, 밴드는 이래서 편리하지만 어떠어떠한 단점이 있고, 페이스북은 이러저러한 점 때문에 안 된다. 다들 소셜 미디어 사용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의견이 분분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논쟁이 뜨겁다.
  나는 방관자처럼 그들의 열띤 대화를 귓등으로 흘린다. 한국 시각장애인계 지성인의 모임으로 자처하는 단체의 부회장으로서 다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소셜 미디어 대화방식이 난 매우 싫고, 싫은 걸 억지로 하지 못하는 게 천성인 것을.
  내가 관여하고 있는 단체마다 대부분 단톡방을 운영하며 임원들의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럴 때마다 다소 압박감을 느끼지만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저는 카톡을 안 합니다.” 
  그러면, “아, 투지(2G)폰 쓰세요?”라고 묻고, “아니,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저 안 합니다”라고 다시 대답하면 질문한 사람들 역시 난감한 듯 “아, 스마트폰 사용에 서투른가 보다”라고 여기며 더 묻기도 민망해한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고 혼자 속으로 말한다.
  “난 공간을 초월한 디지털 대화를 싫어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약속을 하고 만날 시간을 기다렸다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악수하고, 못 본 새 혹시 살이 쪘는지, 더 말랐는지, 팔도 좀 만져보고 그러고 앉아 떠들며 얘기하기 좋아합니다. 최소한 전화로 통화하며 서로의 숨결과 목소리에 묻은 감정의 색깔도 느끼며 대화하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발을 담근 채 좀 더 뭉그적거리며 느리게 가고자 합니다. 건조하고 딱딱하고 매끈하고 민첩하고, 쓸쓸하고 애달픈 그리움으로 목이 마를 디지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좀 더 보류하고자 하오니 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4차 산업혁명이다, 사물인터넷이다 하는 귀에도 생소하던 용어가 일상 속에 침투하고 있는 요즘 세상에, 누군가 소셜 미디어 소통 방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미개인 보듯 한다. 난 바로 그 미개인이다. 어린아이는 물론 노인들까지 스마트폰을 통해 SNS를 즐기는 이 시대를 살면서 나는 왜 미개인이기를 자초하는가? 빠름이 선이고 답으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굳이 그것을 거부하는 나는 괴짜인가? 나는 사회 부적응자인가? 나는 고집쟁이인가?
  좋다. SNS라는 디지털 공해와 정크인포메이션으로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에 시달리느니, 그리고 그 공해를 스스로 만들어내느니 차라리 난 고집쟁이, 괴짜, 사회 부적응자이기를 택하겠다.
  만나서 대화하고 싶고, 목소리로 통화하고 싶고, 키보드를 두드리기보다는 펜으로 글을 쓰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종이책으로 책을 읽고 싶다. 시간 낭비, 자원 낭비라고 뭇매를 때리고 싶은가? 때린다면 맞을 수밖에. 나의 손때 묻은 아날로그를 무자비하게 치고 들어와 폐기처분해버리려는 디지털이라는 독재자 앞에 앙탈하며 반항하며 좀 더 시간을 끌 참이다. 디지털 대화를 하지 않을 자유를 얼마간 더 누리게 나를 좀 내버려 두라.
  결국엔 사물인터넷이란 유혹 앞에 무너지고 말 줄은 안다. 시각장애인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신기술이 개발된다면 더 이상 앙탈부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나가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가령 이런 기술이 개발된다면.
  목적지를 말하고 발에 끼고 길을 나서기만 하면 골목 하나, 계단 오르내림 하나하나까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찾으려는 건물의 출입구를 한번 더듬을 필요도 없이 턱 문을 밀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신발이 생겨난다면.
  이런 안경은 또 어떨까? 귀에 걸고 “자, 이제 보자”라고 명령만 하면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을 정확하게 뇌로 전달하여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색감과 질감과 거리감 등 선명한 시각적 효과로 사물을 인식하게 해주는 기적의 안경. 그런 안경이 개발된다면 난 집을 팔아서라도 그걸 사서 귀에 걸고 지체 없이 집을 나서겠다. 그랜드 캐니언으로, 가고 나이아가라 폭포로 가고 저 타가이타이 활화산으로 가겠다. 신이 대자연을 통해 베풀어 놓은 신비와 광대무변하심에 놀라고 충격받으며 가슴 터지는 탄성을 지를 것이다. 남들처럼.
  십여 년 전, 그랜드 캐니언 그 광활하고, 말 그대로 숨이 막히고 입이 딱 벌어지는 장관 앞에 섰던 순간을 기억한다. 숨죽인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지는데, 아무런 감동 없이 마치 동네 개천 앞에서처럼 멍하니 섰던, 그런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가여워서 가슴 속으로 통곡을 삼켜야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날, 기적의 안경을 쓴 난 그 시절을 엷은 미소로 추억하며 조용히 읊조릴 것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에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물론 그렇게 떠나기 전에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거리에 가로수를 보고, 길가에 꽃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신의 놀랍고도 섬세한 예술가적 솜씨에 감격해마지않을 것이다. 그리고 길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떠나고 또 떠날 것이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새로움과 낯섦과 그 모든 신비와 설렘에 관하여 쓰고 또 쓸 것이다.
  걷고 또 걷다가 어느 바닷가 혹은 강가에 이르면, 흐르는 물빛 속에 어른거리고 수평선 너머로 아련해지는 아날로그 시절을 추억할 것이다. 아날로그의 느림과 촌스러움과 정겨움을 희미한 기억으로 그리워하며, 디지털 텔레파시 통화기를 꺼내 멀리 내가 나고 자란 땅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디지털 대화를 청할 것이다. 그리움 가득 담은 디지털 대화를.
(2018. 12. 1. 제1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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