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언제나 조심할 일이다
임경억
지난여름의 일이다. 기억들 나겠지만 무척 뜨거웠던 여름이었다. 초대형 용이 입에 불을 뿜으며 줄곧 나를 쫓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때 나의 가장 좋은 피서지는 지하철이었다. 그날도 나는 안내인과 함께 경춘선 지하철을 타고 청평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냉방시설은 그만한 곳이 없었다. 청평역에서 내려 목적지를 찾아 땡볕 길을 걷고 있었는데 길을 묻기 위해 자그마한 가게 앞에 멈췄다. 가게 주인은 친절했다. 길을 파악한 뒤 떠나려는데, 가게 주인은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고 가라고 권했다. 안내인은 흔쾌히 받아 마셨지만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내인은 나에게 목도 탔을 텐데 왜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는지 궁금해 했다. 나는 집 밖에 나가면 물을 잘 마시지 않는 버릇이 있다. 화장실 가는 일도 귀찮을뿐더러 장이 튼튼치 못해 자주 탈이 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물을 사양했던 것인데 정작 입에서 나간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아무데서나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내인에게 공격받았다.
“그렇다면 저는 아무데서나 물을 마신다는 말씀이에요?”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는데, 상대에게는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말의 실수를 만회하려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려 했으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버린 것, 구구한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같은 실수가 단순히 말의 실수로 끝나면 상관없겠지만 ‘차별’과 연관지어지게 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특히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스포츠인, 방송인 등의 차별 발언은 말 실수라기보다는 자신의 차별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한 거물 정치인이 장애인 관련 행사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반대 당 정치인을 빗대어 신체적 장애인보다도 못한, 한심한 사람이라고 발언하여 호되게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흘러나온 말일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장애인계 인사들이 모인 회의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간 큰 사람이라 하더라도 장애인을 앞에 두고 직접적으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을 대놓고 하겠느냐마는, 분명 그의 발언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적이 밉고 싫다 해도 장애인을 빗댄다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2년 전 서울에 있는 모 대학교 강의실에서 교수가 장애인 학생을 가리키며 “이 학생은 장애인인데도 배우려고 이곳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하여 장애인 비하 발언에 대한 사과문까지 발표했었다. 이 역시 본의는 장애인을 차별하려던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했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역시 장애인을 비장애인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했음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의 문맹자는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갈파했다. 참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다. 말을 한다고 해서 다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입에서 내뱉는 말이 듣는 이에게 어떻게 들릴 것인가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고 하는 말은 품위 있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라 할 수 없다. 21세기의 문맹자가 되지 않기 위해 ‘공감의 언어’를 배워 나가야 할 때인 것 같다.
(2019. 3. 1. 제102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