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에 맞이하는 봄
유석영(파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장)
아직도 라면을 더 좋아하고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보면 정신없이 먹어대는 내가 벌써 나이 오십이란다. 잘 삐지고 반찬 투정 여전한 데, 젊은 사람들이 나를 어른이라 부른다. 어색해서 아니라고 우겨도 현실 속에 나는 이미 오십 대의 반열에 들어 서 있다.
어린 시절에 오십 대의 어른을 보면 세대 차이가 많이 나서 무척 대하기 어려웠었는데, 어느새 내가 여러 개의 이력과 영역을 확장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어른들 틈에 끼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끌어야 할 때와 책임져야 할 일이 더 많아져 있고, 장난치며 까부는 모습을 함부로 내 보일 수도 없게 되었다. 내가 벌써 그 위치에 와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도 안 되고 선뜻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미 내 인생의 시간표 맨 윗칸에는 ‘오십’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서 저항할 여지없이 그대로 순응할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십 살 먹은 사람으로서 밥값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빚지고 안 갚은 건 없는지, 이곳저곳에 중요한 것들을 흘리고 다니지는 않았는지 차분하게 중간 점검을 해 봐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중년의 아내와 다 커서 여인이 되어있는 두 딸에게는 가장으로, 팔십을 바라보는 부모님에게는 걱정거리를 제공하는 아들이며, 파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는 관장이라는 이름으로, KBS 제3라디오에서는 한 코너를 책임지는 방송인으로, 그 밖에 여러 단체에서 주섬주섬 맡은 크고 작은 직책들 속에 내가 서 있다. 남들은 의지와 열정이 강하다고 이야기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고, 어쩌면 온 몸에 꽉 차 있는 욕심과 오기가 더 크게 작용해서 남이 가져야 할 기회를 잡아당기며 살아오지 않았나 느껴 본다.
나를 서럽게 했고, 때로는 좌절하게 만들었던 시각장애! 주민등록번호와 늘 붙어 다니며 때로는 무거운 짐이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죽음의 문턱으로 나를 몰고 가는 못된 엔진이었으며, 이제껏 내 생활을 불편하게 만든 심술궂은 친구이기도 했다. 딱 한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원 없이 봤으면 하는 바람을 적지 않게 가졌었고, 지금 역시도 그 생각은 현실로 다가오기를 기대하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뭔가 절실하게 필요로 할 때, 반드시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꿈으로 가지고 있었던 방송인의 길을 CBS 박문국 PD를 만나면서 이룰 수 있었고, 가수 서유석 선생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 등,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아직 집 장만도 못했고, 안정된 노후 대책도 따로 마련해 놓지 못했지만 넉넉한 인적 자산이 있어 절대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또한, 은밀한 부분까지 다 맡기고 믿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죽는 일마저 하나도 두렵지 않다.
시각장애 때문에 어렵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풍부한 인맥과 마음 깊이 뿌리 내린 하나님과의 관계, 열심히 땀 흘릴 수 있는 일터가 나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까지는 철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고 푸념만 늘어놓았었는데, 나이 오십이 되어 조목조목 뜯어보니, 자랑해도 좋을 만큼 멋진 부분도 많다.
어른이 되어 맞이하는 올 봄은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던 터라, 기쁨도 크고 설렘도 많다. 사랑의 힘도 쑥 자라는 느낌이고, 더 달려서 넓은 세상 한 가운데에 나를 세워 보고 싶다는 열정이 샘처럼 크게 솟아오른다. 잉태된 좋은 꿈이 확실하게 손으로 만져진다. 머지않아 나의 삶 속에 더 화려한 꽃들이 만발할 것이며, 튼실한 열매도 풍성하게 거둘 것이라 충분하고도 확실한 기대를 가져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자랐던 부분들을 분명하게 채워가야 할 것이다. 겸손이 모자랐고, 나누는 일에 망설였으며, 배려가 매우 부족했었다.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 박약했고, 지혜와 신의가 모자란 탓에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었었다. 부드러운 봄 햇살이 거칠게 얼어붙은 산야를 품에 안아주듯, 따뜻한 가슴으로 아프지 않게 주변을 꼭 안아주며, 나 혼자 여러 걸음 앞서가기 보다는 모두와 손잡고 함께 가는 아량을 가져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어 갈 것을 스스로 다짐해 본다.
지난날 내가 힘겨워했던 때를 기억하며, 순간순간마다 나를 도와주었던 많은 은인들의 가슴을 떠 올리며,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닮아서 진짜 좋은 일 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쉬지 않아야 하겠다. 세상을 배우며 열심히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철든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지만, 라면과 붕어빵은 눈치 안보고 먹고 싶을 때 낯가리지 않고 계속 먹을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