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
정철우(명예보건학박사)
겨울을 지난 산수유는 봄이 오는 것을 노란 꽃술을 펼쳐 알려주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파릇파릇 새 순을 밀어 올리는 계절의 순리를 우리는 자연의 이치라고 한다.
뿌리들이 언 땅 밑에서 쉼 없이 물기를 끌어올리는 열정이 없었으면 새 순 밀어 올리는 힘을 어디서 얻어오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리는 땀의 열매가 지구를 환하게 밝혀주듯이 쌓인 눈 밑에서 고개 들어 올리는 복수초나 얼레지 꽃의 향연으로 봄은 온다.
어떤 이들은 변산 바람꽃을 찾아가 봄을 맞고 매화꽃 터지는 소리 들으며 봄을 맞는다고도 하지만, 나는 거리 보도블록 사이로 파랗게 얼굴 드는 꽃냉이를 보며 봄을 맞는다. 아니, 삭신거리는 근육통과 새큰거리는 관절통으로 봄을 맞는다.
겨울 칼바람에 주저앉았던 걷기 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도 꽃망울 터지는 소리였다.
아파트 정원에 심었던 산수유 한 그루가 어느 날 몽글한 몽우리를 터치며 봄이 왔으니 코트를 벗으라고 생글거리는 바람에 성급하게 얇은 겉옷 걸치고 외출했다가 삼일을 콜록이며 누워 뒹굴었다. 싱그러운 봄이라는 말에 들뜨는 걸 보며 아직은 갓 스물의 자리가 내 자리인 줄 착각하는 치매 끼도 즐겁기만 하다.
사람 자체를 성형한다 큰소리치는 성형의술로도 손등의 노화만은 어쩌지 못하는 사실 앞에 고개를 숙였다던가? 나이를 알려면 손등을 보라던 말에 끄덕이던 게 언제였던가. 손등에 솟는 불거지는 핏줄들을 쓰다듬으며 막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을 인정해야 하는 이 쓸쓸함.
봄은 희망이라 하기도 하고 잔인하다 하기도 하는데 세상에 정의내릴 수 있는 잣대가 어디 하나이랴? 철학의 잣대, 신앙의 잣대, 과학의 잣대, 의학의 잣대, 자만의 잣대….
그 놈의 잣대가 항상 문제를 가져온다.
봄은 봄이어야 하는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곧 뒤란 냇물소리가 생각을 간질이리라.
콧물 손등으로 닦으며 딱지치기 하는 동네 꼬마들을 요즘은 볼 수 없다. 세상이 변해서 모두 학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에게서 봄은 자리를 잃었다. 다시 귀농생활이 꿈이 된 세상.
용감한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돌아가 흙과 자연을 친구 삼는 지혜를 가르친다. 조금 느리게 사는 법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리라 믿는 것이다. 그들은 빠르게 앞만 보며 달려왔던 세대에서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화려한 경제 성장과 과학의 발달, 의학의 발달 앞에 잃은 것이 더 많은 치유할 수 없는 병명들과 망가진 인간의 모습 등을 보며 자연으로 돌아가자를 외치게 된 오늘 공부가 인생을 책임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우수 대학을 나와서도 뜻을 펼치지 못하는 많은 청년들을 보며 자꾸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시간을 잡아보지만 더 뒤지는 현실 앞에서 옛날의 지혜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많이 편해진 세상이다. 팔순을 지난 어느 노 시인은 오래 살아서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 가를 보고 싶다고 하지만 편해지는 만큼 망가지는 부분이 있고 망가지는 만큼 독이 되는 세상이 오리라고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누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돈다고 했는가? 그 화려했던 오스만 터키 제국이 오늘 날 어떤 길을 걷고 있으며, 복지제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이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를 돌아 볼 때 영화와 발전만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어찌되겠는가? 눈앞의 호화로움을 즐기는 동안 망가지는 우리 아이들의 세대는 어찌 되겠는가?
아마도 기온 변화로 봄은 영영 오지 못하고 말지 않겠는가? 봄은 산수유 터지는 소리, 매화꽃 벙그는 소리, 눈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 기지개 켜는 소리로 찾아오는데 우리는 영원히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오늘도 권력만을 앞세워 핵을 쏘아대는 나라들 때문에 지구 온도가 낮아지고 있는 현실을 기억하자.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누리는 만용을 휘두른다면 그 대가는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는 진리 앞에 자숙하는 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