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用 책 녹음하는 76세 '목소리 천사'
박상기 기자
입력 : 2013.11.28 03:00
[자원봉사자 황임숙 할머니]
27년간 한 주에 한 권씩 녹음, 국내 녹음도서 1만3000권 중 1500권이 黃할머니 작품
장애인들 점자로 팬레터 보내… "특히 욕을 구수하게 잘해요"
황임숙씨가 지난 25일 오전 서울 강동구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에서 시각장애인용 녹음도서 제작을 위해 판타지 소설‘섀도우 헌터스’를 읽고 있다. 27년째 녹음도서 제작 봉사활동을 해온 황씨는“봉사활동 덕분에 젊은이들이 읽는 이런 책도 읽어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윤동진 객원기자 황씨는 27년째 주말을 제외하곤 매일 아침 일찍 이곳을 찾아 4시간씩 책을 읽고 있다. 평균 1주일에 한 권씩 그동안 황씨가 녹음한 책은 1500권을 헤아린다. 1983년 처음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도서가 제작된 후 지금까지 총 1만3000여권의 녹음도서에 40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는데 황씨 혼자 9권 중 1권을 책임진 셈이다. 지금도 녹음도서 제작실에서 한 달에 만드는 40권 중 7~10권은 황씨의 작품이다. 녹음도서 제작실을 관리하는 최현철(54)씨는 "시각장애인들이 우스갯소리로 '황임숙 모르면 간첩'이라 한다"고 말했다.
전업주부였던 황씨는 1986년 1월 3일 첫 녹음을 시작했다. 막내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진 그에게 조카가 봉사활동을 권했다. 독서를 좋아했던 황씨는 별생각 없이 자원봉사에 나섰다. 그는 "한 시각장애인이 내가 만든 녹음도서 소식을 듣고는 '와, 이 책 드디어 나왔네'라며 좋아하는 걸 봤다"며 "평생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만 해온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온몸에 전율이 왔다"고 말했다.
녹음도서는 다양한 책을 접하려는 시각장애인들의 유일한 벗이다. 300쪽짜리 책을 점자도서로 만들면 보통 80권이 넘어가기 때문에 제작이 어렵지만, 녹음도서는 한번 만들면 장애인복지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황씨는 "똑같은 책도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확 다르더라"며 "항상 내 부모 형제가 시각장애인이고 그이들한테 들려준다고 생각하며 읽는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강용봉(51)씨는 "황 선생님은 특히 욕을 구수하게 잘한다"며 "태백산맥을 듣는데 욕이 너무 진짜 같아서 정말 재미있었다"고 했다.
황씨에겐 매년 명절마다 '건강관리 잘하시고 오래도록 읽어달라'고 전화하는 열성팬도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눈과 두 손을 모두 잃은 한 60대 남성은 황씨를 만나러 와서는 "어떻게 생긴 분인지 꼭 확인하고 싶다"며 순식간에 황씨를 등에 업더니 "이렇게 생긴 분이셨군요. 항상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황씨는 "점자로 '고맙습니다'라고 쓴 첫 팬레터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며 "인기가 많다지만 사실 '황임숙 그만 좀 읽으라'는 안티 팬도 많다"며 웃었다.
올해 76세지만 황씨가 그동안 결석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신간을 기다리는 '팬'이 많아 새 책이 나오기 무섭게 직접 책을 사다가 녹음도서를 만들고,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은 수영을 다니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부부싸움을 한 다음 날은 녹음에 집중이 안 돼 남편과 싸운 적도 거의 없다고 했다. 황씨는 "부모 밑에서 자란 25년, 자식 키우며 보낸 25년을 생각하면 이 일을 시작한 쉰 살 때부터 비로소 오롯이 진짜 내 삶을 산 것 같다"며 "주변에서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사실 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건 나 자신"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