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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효과는 운동이 신체에 미치는 효과와 같다고 한다. 독서만큼 값이 싸면서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없다. 독서를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시각장애인이다. 시각장애인들은 비시각장애인(정안인)들이 쓰는 문자 대신 특수한 점자로 문자생활을 한다. 하지만 점맹률(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무척 높다. 전체 시각장애인을 놓고 따지면 점맹률이 95%에 이르고, 온전히 점자에만 의존해야 하는 중증 시각장애인을 기준으로 해도 점맹률이 70%를 웃돈다.

펼쳐진 점자책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문맹(文盲)률이 가장 낮은 나라다. 문해(文解)율이 무려 99.8%에 달한다. 이는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 덕분이다. 하지만 광복 직후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이 문맹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문맹 퇴치를 위한 사회적 노력’이 문해율을 높이는 데 원동력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각장애인의 점맹률이 높은 것은 그들을 위한 ‘사회적 투자’가 그동안 부족했던 탓이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오랫동안 점자교육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최근에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대학에서 전공 과목을 공부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여전히 교재난에 허덕이고 있다. ‘점역사’라는 직업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복지에 대한 사회적 투자가 늘어날 것이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역 복지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시각장애인의 수는 미등록 장애인까지 합치면 약 30만 명에 이른다. 이중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1~3급의 중증장애인은 4만~5만 명이다. 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 때문에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 정상인보다 더하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모든 세상일이 궁금하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지적 호기심도 크다.

그런 ‘세상으로 향한 문’을 열어주는 열쇠 중 하나가 점자도서다(시각장애인들에게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책으로는 ‘녹음도서’와 ‘전자도서’도 있음). 그리고 이 점자도서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점역사’라고 부른다. 직업군이나 자격증 분류에는 ‘점역사’가 없다. 공식 자격증 이름은 ‘점역교정사’다. 그러나 업무 현장에서는 ‘점역사’와 ‘교정사’가 분류된다. ‘점역사’는 점자도서나 전자도서를 만드는 일을 한다. 그것을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교열(검열)하는 사람이 ‘교정사’다.

한 시각장애인이 점역된 내용을 교정하고 있다. 그 손길이 무척 분주해 보인다.

점역사가 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국어와 영어는 기본이고, 수학, 과학, 컴퓨터, 음악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관련 공인자격시험으로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kbuwel.or.kr)가 주관하는 점역교정사 1·2·3급 시험이 있다. 이중 3급의 경우 20세 이상으로 고졸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사람이나 시각장애인 관련기관에서 점역·교정 업무를 3년 이상 한 경력자라야 응시할 수 있다. 시험은 한글맞춤법과 한국점자규정에 맞도록 점역·교정하는 국어 과목을 치른다.

2급은 3급 자격을 취득한 후 1년 이상 경과한 사람으로 4년제 대학 이상 졸업자·졸업예정자 또는 시각장애인 관련기관에서 점역·교정 업무를 4년 이상 한 경력자가 응시할 수 있다. 시험은 한국점자규정에 맞도록 점역·교정하는 실무를 평가하고, 수학·과학·영어·음악들 가운데 하나 이상을 선택해야 한다.

1급은 2급 자격을 취득한 후 1년 이상 경과한 사람으로 4년제 대학 이상 졸업자·졸업예정자 또는 시각장애인 관련기관에서 점역·교정 업무를 5년 이상 한 경력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시험은 한국점자규정에 맞도록 점역·교정하는 실무를 평가하고, 2급 자격시험을 통과한 과목 외의 전 과목을 치른다.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의 컴퓨터점역팀 점역·교정사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얼핏 보면 학력제한이 있는 듯하지만, 시각장애인 관련기관에서의 실무경력으로 대체할 수 있으므로 학력의 문턱은 없는 셈이다. 나이 제한은 없다(20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 물론 점자를 익히고 점역 프로그램 사용법만 익혔다면 자격증 없이도 활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2급 이상의 자격증을 따야 관련기관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관련 종사자들의 얘기다. 자격시험 과목 등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서울점자도서관(02-935-9696)으로 문의하면 안내 받을 수 있다.

점역은 시중의 일반도서를 점자로 옮기는 작업이다. 따라서 한글맞춤법 등 어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일반도서에 오·탈자가 적지 않고, 옮기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생길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점역은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원칙이다. 원문의 오자를 점역사가 고쳤을 경우에는 고친 이유를 밝혀 둘 정도다.

점역사의 세계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 컴퓨터점역팀 송지숙 팀장.

어문지식도 중요하지만 ‘시각장애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시각장애인은 손끝의 감각만으로 세상을 읽어야 한다. 작은 차이로 의미 전달이 흐려질 수 있다. 점역사가 조금만 소홀해도 시각장애인은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의 불편을 덜어 주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점역사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의 송지숙 컴퓨터점역팀장은 “점역은 좌절과 역경을 딛고 반드시 일어서야만 하는 시각장애인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런 만큼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나의 불편과 수고를 감수하고, 그들이 좀 더 읽기에 쉽고 편리한 책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점자를 좋아해야 일도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점역사들은 “점역사의 전망은 어둡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감소 추세지만, 사고와 당뇨 등의 질병이 증가하고 수명이 크게 연장되면서 후천적으로 실명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역사 수가 크게 부족하다. 현재 국내 점역사는 1·2·3급을 통틀어 550명쯤 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점역 일을 원활히 해낼 수 있는 1·2급 자격증 소지자는 100명 내외다. 절대 부족이다. 이 때문에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필요한 책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점역사들의 바람과 달리 점역사의 미래는 어둡지 않은 것이다. 물론 점자도서 수요가 시각장애인 수 증가와 비례하지는 않는다. 점자도서를 대신할 녹음도서와 전자도서 등도 크게 발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수준으로도 점역자 수는 부족한 형편이다. 근무환경은 좋은 편이다. 사회복지시설과 전문출판업체 등 활동 분야에 따라 환경이 조금은 다르지만, 대부분 업무는 장애인복지관 등에서 이루어진다. 당연히 보수 역시 복지시설 근무자에 준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역도서는 문자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앞으로 복지 수준이 높아질수록 점역사들에 대한 수요도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차분한 성격에 남을 위하는 배려의 마음이 큰 사람이라면 점역사를 직업으로 선택해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