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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큰 형님이 된 사연(김창민)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8-05-15 오전 9:40:39 (조회 : 103)
내가 큰 형님이 된 사연
김창민
  * 모로코에서 폐비닐재활용 공장을 계획하다
  1997년 IMF 시절, 한 지인이 모로코 아가딜 교민회 회장을 소개했다. 교민회 회장은 나에게 모로코에 공장을 하나 세우자고 하였다. 한 달간 고민한 끝에 모로코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가딜 주지사에게 정식 초청장이 도착했고, 나는 비닐공장 설계도를 작성해 모로코로 떠났다.
  아가딜에 도착해 교민회장 집에서 묵었다. 며칠 후 주지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인상 깊은 풍경을 마주했다. 농가마다 산처럼 수북이 쌓인 더미가 있었다. 일행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폐비닐’이라는 답변이 왔다. 이 나라에선 가장 큰 중죄가 환경파괴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폐비닐을 땅에 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태우지도 못하니 해마다 쏟아지는 폐비닐을 저렇게 쌓아둘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모로코 도시는 깨끗하고 공기는 맑고, 길을 걸을 때마다 향수를 뿌린 것처럼 좋은 향기가 가득하다. 모로코에 없는 세 가지가 있다. 모기가 없고, 파리가 없고, 쥐가 없었다.
  주지사를 만나 산같이 쌓여 있는 폐비닐 처리 방법과 공장 건립을 논의했다. 주지사는 비닐공장을 세우기 전에 폐비닐재활용 공장을 먼저 세워야 된다고 했다. 나는 다시 몇 달간 폐비닐 재활용공장 설계를 했다. 서울에서 설계 기술자를 초청하여 완성한 설계도를 들고 주지사를 만났다. 그는 몹시 기뻐하며 당장 공장을 짓자고 서둘렀다.
  그러나 물이 귀한 모로코에선 공장 건립이 쉽지 않았다. 주정부에서 파견한 직원과 함께 아가딜 전 지역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물이 있는 곳엔 주민 거주지가 빽빽하고, 설립 장소를 선택하면 지하수가 없었다. 그렇게 공장 건립 장소를 확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공사가 시작되자 일이 제대로 되는 느낌이 들었다.
  * 부도 한 달 후,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다
  2000년 2월 10일 한국에 있는 딸의 전화를 받았다. 회사가 부도나고 아파트까지 압류당했다고 울먹인다. 매달 회사에서 보내주는 체류비를 2월 초에 보냈는데 부도라니! 주지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급히 귀국했다. 내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원료 공장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랫동안 공장을 비워둔 사이 원료를 외상으로 사들이고, 이것으로 제품을 만들어 덤핑 가격으로 현금을 받고 팔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한 날 밤 채권자와 양해 각서에 서명을 하며 보냈다.
  부도를 맞고 꼭 한 달이 지났다. 3월 12일이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밤사이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급히 안과를 찾아갔다. 이상하리만큼 긴 병명을 대었다. 너무 큰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다가 모든 일이 끝나니 이미 끊어진 시신경이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몇백만 명 중에 한사람 있을까한 병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가딜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공장 건립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주지사는 그래도 들어오라고 했지만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손에 쥔 것이라곤 하나 없이 딸과 서울로 올라왔다.
  주민센터에 전입신고를 하러 가니 직원이 ‘시각장애인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복지카드’를 달라고 했다. 나는 복지카드가 뭐냐고 물었다. 시각장애인이 된 지 4개월밖에 안 돼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직원은 서류를 내어주었다. 한 달 후 복지카드가 나왔다.
  * 김 반장의 형님이니까, 큰 형님이지!
  2000년 8월 13일 정식으로 1급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문득 안마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이 들어 대한안마사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점자를 아느냐고 하기에 모른다고 하니 그럼 점자를 먼저 배우라고 한다. 수소문 끝에 시각장애인연합회에 전화를 했다. 나이가 몇이냐고 하기에 67세라고 하니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복지관 여러 군데에서도 거절을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에 전화를 걸었다. 거절하지 않았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딸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서도 역시 나이를 물었다. 왜 이렇게 나이를 묻느냐고 되물었더니 나이 많은 분들은 일주일도 참지 못하고 떠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 재활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남자 교육생 7명, 여자 교육생 2명, 그리고 나까지 총 9명이 재활교육에 들어갔다. 50대인 김형규 씨가 교육생 반장을 맡았다. 모두들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한 방에 4명이 있는데 20대 아이들은 딸에게 누나라고도 부른다.
  어느 날 교육생들이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나는 ‘왜 할아버지라고 하냐?!’라고 물었다. 교육생들은 ‘그럼 뭐라고 그래요?’라고 의아해했다. 나는 말했다. “김 반장에게 형님이라고 하고, 김 반장은 또 나에게 형님이라고 하지 않니? 그러니 나를 큰 형님이라 불러라.” 그때부터 나는 큰 형님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큰 형님’하고 소리가 나니 복지관 직원이 조폭 두목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4개월의 교육을 무사히 끝내고 이듬해 나는 함박선교회 점자교사를 맡았다. 임지빈, 백남중, 한태순, 김성일 선생님을 비롯한 복지관 임직원들에게 진실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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