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으로부터의 행복
천병은(소설작가)
전철역 앞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햇살이 너무 따사로워 햇살과 함께 더 머물고 싶단 생각에 근처 화단을 찾아 걸터앉았습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 코끝으로 온갖 내음들이 파고들었습니다. 군고구마 냄새, 붕어빵 냄새, 김 굽는 냄새 참으로 구수한 냄새들이 서로 앞다투어 가며 콧속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불쑥 뭔가가 내 손에 와 쥐어졌습니다. 뜨거운 그것은 보드라운 휴지 같은 것으로 싸여져 손에 쥐어졌습니다. 순간 당황한 나를 향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거 먹어요. 호박 고구마라 달거요.”
그건 군고구마였습니다. 그리고 그걸 손에 쥐어 준 이는 그걸 팔고 있는 노파였습니다. 난 주머니를 뒤지며 장사하는 방법도 참으로 가지가지다란 생각을 하며 웃음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노파가 입을 열었습니다.
“왜, 돈을 줄려고. 아니야 돈 받을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앉아 있는 거이 심심해 보여서 이거라도 먹으라고 준 거야.”
나는 주머니를 뒤지던 손을 멈추고 할머니 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고구마는 정말이지 달았습니다. 아니 어쩜 할머니의 마음이 그렇게나 달았는지 모릅니다.
“할머니, 혹시 제가 가엾단 생각이 들어서 이걸 주신 건 아니에요?”
실없다는 생각을 하며 생뚱맞은 물음을 할머니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생기발랄한 여학생에게 고구마를 싸 주던 할머니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볼멘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어구 별소리를 다 하누마. 자네가 뭐가 어디가 가엾어. 가엾은 사람들마다 고구마를 주다가 보면 난 뭘 먹고 살라고. 젊은 양반 쓸데없는 소릴랑 말어...”
순간 부끄러워졌습니다. 물론 농담 삼아 한 얘기였지만 우리네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입견이라는 장신구가 얼마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높낮은 장벽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 하시오. 혹시 안마하시오?”
할머니는 짐짓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물었습니다.
“네, 안마랑 침술이랑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하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답니다.”
“글을 쓴다고. 눈이 안 보이는데 글을 쓴단 말이요. 그거 대단하구만. 정말 대단해.”
역시 할머니 가슴 한켠에도 선입견 주머니가 달려 있었습니다.
“할머니, 눈이 안 보여도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별별 일 다 할 수 있어요. 컴퓨터가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이 있어서 글을 쓸 수가 있어요. 이미 예전에 장편소설을 냈고 조만간 또 하나의 장편소설이 나올 거예요.”
“세상에 이럴 수가. 정말로 장하구만 엉 장해.”
할머니의 까칠한 손이 내 손을 힘껏 잡았습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먼 먼 기억 속에 엄마의 그 까칠한 손의 감촉이 떠올라 눈시울까지 뜨거워졌습니다.
“젊은 양반, 혹시 책이 나오거들랑 나한테도 하나 갖다 줄 수 있을까?”
할머니는 대단히 미안하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할머니, 그럴게요. 꼭 잊지 않고 갖다 드릴게요.”
우린 그다지 길지 않은 삶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부대끼며 살고 있습니다. 때론 섭섭하고, 때론 억울하기도 하고, 또 때론 분노의 대상이기도 한 그런 만남과 만남 속에서 뒹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상하고 가슴 아픈 일들만을 보지 않고 그래도 비록 한 순간 한 토막일진 모르겠지만, 즐겁고 행복한 그걸 붙잡고 우리 모두는 오늘 하루를 자위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삶은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살면 행복할 것입니다. 욕심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이끌어간다고 봅니다. 눈높이를 조금만 낮춘다면, 욕심의 주머니를 조금만 졸라맨다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을 전신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분명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이 오늘의 햇살을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바로 어제 세상을 떠난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걸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작은 것으로 행복해 하는 기쁨이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