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음악처럼 아빠까따르
원윤선(전화상담원)
흙탕물에 발을 더럽히며 쏟아 붓는 빗줄기를 뚫고 그들의 전통촌으로 뛰어들 때에 우리를 맞이하는 환영의 소리, “대-한민국 빠빠-빠빠빠, 오- 삐승꼬리아, 안녀-아세요.”
예닐곱 혹은 기껏해야 열 살도 못되었을 어린 아이들이,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준비한 환영인사다. 물론 돈벌이를 위해 어른들이 가르쳐 뜻도 잘 모른 채 그냥 외워서 외치는 소리일 테지만 아이들은 정말 기쁜 듯, 반가운 듯 노래 부른다.
싱가포르 여행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끼워 넣은 관광이다. 싱가포르 단일여행보다 가격도 조금 저렴하지만 한 번에 세 나라를 경험해보는 이점도 있기에 이 코스를 택했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들이 원해서 떠나게 된 여행이다. 최근에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와 종강일에 그들의 만남도 끝이 났단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연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가슴이 뻑뻑이 아파 아무 일도 못하겠다며 텔레비전만 보고 군것질만 해댄다. 보다 못해 잠시 여행을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권했더니 꽤나 반기며 그러잔다. 혼자 훌훌 다녀 오랬더니 오랜만에 엄마랑 같이 여행하잔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짜여진 스케줄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미된 죄로 이번에도 희생하겠다며 생색을 냈다. 그렇게 떠나온 여행길인데 막상 여행지에서는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습하고 찌는 듯한 몬순기후의 영향인지 아침부터 쏟아 붓는 빗줄기 때문인지 가라앉는 기분을 가누기 위해 좀 많이 애를 써야 할 정도다.
“대-한민국 빠빠-빠빠빠”
인도네시아 어린아이들의 인사소리는 명랑하고 발음도 꽤나 명료한데 마음은 쉽게 밝아지지 않는다. 자신들이 외치는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저들은 알까? 집에서는 모두 왕자님 공주님이고 학교든 그 어디에서든 세상이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 또래 아이들이, 저쪽 어느 나라에는 적지 아니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까? 최소한 그 나이라면 학교에 가고 부모 앞에 응석부리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갖고 싶은 걸 위해 떼쓰기도 하며 사는 아이들에 대하여 알고 있을까? 세찬 빗줄기도 마다않고 흙탕물에 발을 적시며 나를 반기는 저 아이들 때문에 내 가슴이 뻐근하다.
아이들의 인사소리를 뒤로 하고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를 뚫으며 우리 일행은 작은 건물로 들어섰다. 말이 건물이지 공터에 천막을 쳐놓은 느낌이다. 양쪽으로 출입구만 뚫려 있고 문도 없는 모양이다. 한쪽에 놓인 기다란 의자에 우리는 앉았다. 가장자리에 앉게 된 나는, 출입구를 통해 몰아쳐드는 빗물에 흠뻑 젖는다. 굳이 피할 생각도 없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지금부터 인도네시아 전통춤을 보여 준단다. 14세에서 16~7세 소녀들이 춤을 출거란다. 인도네시아 여자들은 열네 살부터 결혼할 수 있고 남자들은 법적으로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고 한다. 저 무용수들 중 이미 결혼하고 출산한 소녀들도 다수 있단다. 은은히 음악이 흐른다. 이 나라 전통악기로 연주한 것 같은데 플루트 음과 매우 유사한 것이 그리 이질감 없이 귀에 아름답다. 음악에 맞추어 소녀들의 춤이 시작됐나 보다. 한 곡이 끝나고 두 곡이 끝나고 세 곡이 이어진다. 소녀들의 춤동작이 어떠하며 복장이 어떠하며 춤이 아름다운지 어떠한지 굳이 묻지 않는다. 그냥 음악에 젖으며 비에 젖으며 춤은 그냥 쓸쓸한 춤으로 상상한다. 곡조가 약간 느릿하고 다소 침울한 것이 빗소리와도 잘 어울리는 걸 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춤이 끝난 모양이다. 음악이 멎고 박수소리. 나도 따라서 박수친다. 빗소리도 같이 박수한다.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간다. 무용수들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셔터를 누르기 전 가이드는 소녀들을 향해 외친다. “김치, 아빠까따르!” 소녀들이 따라 한다. “김치, 아빠까따르!”
아빠까따르는 우리말 안녕하세요에 해당되는 인사말인데, 소녀들의 목소리에 너무 맥이 없다. 전혀 신명이 없고 자발성도 전혀 없고 생의 기쁨도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그저 암기하듯 따라 하는 “김치, 아빠까따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여자를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 회교도 남자로부터 아내로서 사랑받기보다는 성적 도구로 무수히 짓밟혔을 작은 몸들. 그 몸으로 저리 나와 춤을 추고 돈을 벌어 들어가야 하는 저 아이들.
서글픈 음악처럼 아빠까따르 아빠까따르 끝없이 흐른다. 관광객들이 가족별로 혹은 개인별로 각자 기념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울컥 눈물이 난다. 여행지에서 눈물이라니! 그것도 아름다운 춤을 구경한 끝에. 당황스럽다. 누가 볼까 무섭다. 안경 밖으로 눈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손수건으로 살짝 찍어내고 눈꺼풀에 힘을 준다. 이건 순전히 아침부터 퍼부어대는 저놈의 비 때문이리라.
마지막까지 사진을 찍지 않고 있는 우리 모자에게 가이드가 다가와서 한판 찍어주겠다고 권한다. ‘또 저 아이들에게 김치 아빠까따르를 시켜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아들의 손에 이끌려 무대 위로 올라선다. 가이드가 다시 힘차게 외친다. “김치, 아빠까따르” 서글픈 음악처럼 아가씨들의 힘없는 아빠까따르가 다시 흐른다. 난 양쪽에 서있는 아가씨들의 손목을 살며시 잡아 본다. 수줍은 듯 내게 손을 맡긴 아가씨들의 손목이 너무나 가녀리다. 14~16세 된 아가씨들이, 한국에선 키가 작은 편인 나보다 훨씬 조그맣고 가냘프다. 또 가슴이 뻐근하다. 난 이들을 아녀자라고 부르기 싫다. 굳이 아가씨라고 부를 테다. “아가씨들 안녕!”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고 무대를 내려선다.
일행을 따라 다시 빗속으로 나섰다. 이미 다 젖은 몸, 조심할 것 없이, 웅덩이진 흙탕물도 피할 것 없이 텀벙텀벙 전통촌을 벗어나려는데 다시 아이들이 나타났다. 예닐곱 혹은 여남은 살 쯤의 아이들. 아까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했던 아이들인지 다른 아이들인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한국에서라면 부모 앞에 응석이나 부릴 아이들의 목소리가 “엄마 이뻐요 바나나 천원, 오빠 이뻐요 바나나 천원.” 하며 따라 붙는다. 퍼붓는 빗속에서 지갑을 꺼내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고 가능한 한 못 본체 하라는 가이드의 당부도 있고 하여 우리는 그냥 전진한다. 세워둔 버스에 오를 때까지 그 중 두 아이가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엄마 이뻐요 바나나 천원, 오빠 이뻐요 바나나 천원.”
우산을 접고 버스에 올라서며 한숨을 돌린 아들아이가 1불짜리 두 장을 꺼내 두 아이에게 하나씩 내민다. 아이들은 감사하다고 크게 인사하며 바나나봉지를 건네고 빗속으로 사라진다. 받아 든 건 손가락만한 몽키바나나 대여섯 가락. 껍질을 벗기고 바나나 하나를 살며시 입에 물어본다.
가졌다는 것과 갖지 못했다는 것, 돈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있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것과 없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것. 그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인간의 삶과 심지어 그 가치에 이런 차이를 만드는 걸까? 그 차별은 과연 온당한 건가?
감사의 인사를 메아리처럼 남기며 떠나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소녀들의 아빠까따르가 서글픈 음악처럼 겹치며 빗속으로 흩어진다. 작은 소리로 나도 그 메아리에 답해본다. “아가씨들 안녕, 아가들아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