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항아리
서경애(주부)
빨간 고추를 적시는 빗방울은 신이 난 듯 줄줄 내리고, 손 안에 들어온 고추는 통통하게 살이 붙어 손안이 가득하다. 고추밭 사이사이를 뒤지며 바구니마다 채워 밝은 햇살에 정성들여 말렸다.
이렇게 소중한 것으로 고추장을 만들었다. 햇살은 싱글벙글, 초록의 나뭇잎들은 고운 새색시를 보려는 듯 앞 다투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 새촘히 놓아 둔 고추장 항아리의 모습에 첫날밤 신랑을 기다리는 설렘이 보였다. 파아란 하늘은 조명처럼 비추고 바람을 파트너로 꽃잎은 예쁘게 스텝을 밟는다. 그 위에선 양다리를 가지런히 뻗은 아가씨처럼 수술이 흔들리고 있다. 옛 어른들이 장만 있으면 부자 같다는 말을 이해라도 하듯 가슴이 뿌듯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어,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다 놓았는데?”
초록의 나뭇잎 비료를 받고 있던 고추장 항아리가 안보여 이리저리 살폈다. 나뭇잎들은 경호해야 할 항아리가 없어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양 축~ 쳐져있다.
“어머, 누가 가져갔나봐! 그걸 어떻게 가져갔지? 여자 혼자 들고 가기는 어려울 텐데? 누구야, 양심도 없지. 태양초로 담근 걸 아는 게 분명 나이든 사람이 한 짓이야. 그렇게 먹고 싶으면 반만 덜어가지, 다 가져가나. 나는 어떻게 하라구! 아휴 신경질 나. 그렇게 고생해서 담았는데!”
그 고추장 갖다 밥상에 놓으면서 식구들한테 뭐라고 할까? ‘엄마 이거 어디서 났어?’, ‘여보 방금 담은 고추장 같네.’ 하면 뭐라고 할까? ‘내가 어제 담았어요. 맛있죠?’할까 아니면 머뭇머뭇할까? 그 사람의 처신이 매우 궁금해졌다. 그리고 야속했다. 오늘부터 내 밥상위에 고추장이 없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몇 날 며칠을 식사 때만 되면 입에서 독기를 품어냈다. 괜히 죄 없는 단풍나무, 살구나무 잎만 쥐어뜯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그렇다고 고추장 항아리가 다시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 입만 더 거칠어 질 것 같았다.
‘그래 맛있게 잘 먹어라.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해라.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속이 상할까? 만약 내 것을 잃어버렸으면 나는 어떨까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람으로 고추장 잃어버린 것을 대신 하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고 고추장 항아리가 있던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데 또 한 번 놀랄 일이 생겼다. 항아리 옆에서 춤을 추었던 화분들도 다 없어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항아리 주변이 한 폭의 그림 같았나보다. 그것을 다 떼어다 자기 집 베란다에 놓으면 이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뭔가 한참 잘못 생각했다. 다홍치마 같은 고추장 항아리와 화분들만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시골집 같이 작은 꽃밭 사이에 있어 그 풍경이 더 빛났던 것을 모르는 게다. 그 집에 고추장과 화분들을 놓았다고 해도 자기 마음만큼 우중충해 보여 어쩌면 화분을 곧바로 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깨소금 맛이다.
이제 잊어버리자. 비록 일 년 동안 고추장 없이 궁색하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심판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