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와 안마
문성호(자치경찰연구소 소장, 정치학 박사)
헬렌 켈러의 시청각 장애 극복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의 생업인 안마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이 바로 그 헬렌 켈러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알다시피 해방직후 미군정당국은 안마를 금지시킨다. 그 뒤 침구사 제도는 다시 풀리진 않았지만 안마사는 헬렌 켈러 덕분에 시각장애인이 다시 할 수 있도록 바뀐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카롤라 베레스포드-쿠크의 저서와 일본 측의 인터넷 영어 자료를 보면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국과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미군정 측은 귀환한 일본병사들이 온몸에 침 바늘 자국과 뜸으로 타버린 살갗을 보고, 안마·침·뜸이 야만적인 의료행위라며 전통적 의료행위를 일체 금지시킨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도 마찬가지 조치를 취한다. 동양의학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한일 미군정 당국의 잘못된 조치였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을 막론하고 촉지가 발달한 시각장애인 다수가 전통적으로 안마와 지압을 생업으로 살아갔다.
당시 생존해 있던 헬렌 켈러는 일본시각장애인연합회 측으로부터 그 전말에 관하여 전해 듣게 된다. 이에 헬렌 켈러는 미국의 여론에 호소함은 물론이고, 당시 트루만 대통령의 미국정부 측에 대하여 직접 나서서 시각장애인의 생계수단을 박탈한 안마·침·뜸 금지조치를 풀어달라고 탄원과 진정을 내기에 이른다.
미국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헬렌 켈러의 호소와 진정을 받아들였으며, 일본과 한국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다시 안마사와 지압사로 일할 수 있게 금지 조치를 풀어주기에 이른다. 형식은 일본과 한국 정부가 해제한 것이지만, 정작 헬렌 켈러가 정치적으로 대변해준 덕분에 일본과 그리고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이 다시 안마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헬렌 켈러의 이 미담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헬렌 켈러의 이런 활동상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여 맹학교 교과서에 수록하고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하면 좋겠다.
헬렌은 장애인 인권을 옹호하고, 이를 위해 사회주의운동이 필수라고 인식했다. 실제로 여성참정권, 사형폐지, 아동노동반대, 인종차별반대 운동들을 활발하게 벌였고, 또한 여성피임에 찬성했다. 1915년에는 ‘헬렌 켈러 인터내셔널’을 설립하여 시력건강을 연구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인권운동연합(ACLU) 설립에도 한 몫 한다. 오늘날까지 왕성한 시민운동을 벌이는 이 단체는 우리나라 참여연대에 해당한다.
헬렌은 29세 때 사회당에 입당하면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공개서한과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당 대통령후보 유진 뎁스를 전폭 지원한다.
1912년 ‘워블리’라는 세계산업노동운동단체에 가입한 헬렌은 노동운동에 왜 투신하는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제가 시각장애인실태조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직접 조사해본 결과, 이제까지 시각장애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천형이라 생각하던 고정관념이 잘못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시각장애란 잘못된 노동조건이 원인이며, 이는 흔히는 고용주의 이기심과 탐욕에 기인한 것임을 조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회악도 한 몫 합니다. 가난이야말로 여성을 매춘으로 내몰고, 급기야 매독으로 인한 시각장애를 당하게 만듦을 밝혀냈습니다.”
헬렌 켈러는 흔히 앤 설리번 선생의 인내와 사랑으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여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그녀가 이처럼 사회운동을 실천한 사회주의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시각장애인 운동의 비전을 제대로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업 중인 스포츠마사지나 태국마사지는 무자격 정안인을 고용한 ‘불법 유사안마업소’이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은 단속을 서로 떠넘기며 단속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안마사들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당국이 헌법소원계류 건이라며 단속하지 않는 것은 결국 공권력 미집행 부작위로써 시각장애인들을 사지로 내모는 정부의 직무유기 바로 그것이다. 마땅히 즉각 시정해야 한다.
계류 중인 유사안마업계 측의 헌법소원 결정이 나기 전에 여론 호소는 물론 온갖 정치력 발휘를 통해 적극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최동익 의원이 입법 발의한 헬스키퍼제도 개선 못지않게 급선무가 아닐 수 없다.
2012년 9월 안마독점 합헌을 위한 대한안마사협회 ‘대국민 호소문’과 10월 안마독점 파기하는 보건복지부는 사죄하라는 전국안마사연대의 ‘성명서’ 발표가 고작이다. 시각장애인이 힘이 없다며, 정부와 불법 유사안마업계의 유착을 통하여 시각장애인 생존권을 박탈하는 행위를 그저 방관만 해서야 되겠는가?
헬렌 켈러가 일본시각장애인연합회의 투쟁과 호소를 받아들여 트루만 행정부를 적극 설득하는, 그래서 일본과 한국의 시각장애인이 기어코 안마사를 다시 할 수 있도록 생존권을 사수해낸, 바로 이 활동들이 곧 정치 아니겠는가? 지금 한국엔 헬렌 켈러는 없다. 그럼 자포자기 하고 말 것인가? 두말 할 나위 없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에게도 정치는 생존권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시각장애인과 단체들은 이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