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와 까치밥
정철우(대전대학교보건대학원 객원교수)
시멘트로 범벅을 해 놓은 도시에 갇혀 살다 보니 어느새 바보가 돼 버린 느낌이다. 언덕배기에 억새가 얼마만큼 자랐는지, 산기슭에 쑥부쟁이가 얼마만큼 피었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이게 바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어쩌다가 산과 들에 나가 보고서야 “아이쿠, 벌써 감나무에 까마귀밥만 남았군. 들판에 원두막이 없어진 것도 몰랐군.” 하고 한바탕 호들갑을 떨지만, 돌아오면 또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산다. 한심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들판에 원두막이 잘 안 보인다. 다들 과일이고 채소고 비닐하우스에서 가꾸니까 그런가 보다. 그래서 참 어쩌다가 가끔 산골 밭머리에 호젓하게 서 있는 빈 원두막을 보면 눈물겹도록 반갑다. 늦가을 산그늘에 동그마니 앉아 길 가는 나그네에게 손짓하는 듯한 정겨운 모습이 더욱 그렇다. 거기에 돋보기안경 끼고 곰방대 문 영감님이라도 앉아 계시면 아주 생기가 도는 풍경이 될 법한데, 주인 없는 원두막은 아무래도 쓸쓸해 보인다.
원두막을 보고 한순간 생각이 꼬리를 물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옛날 여름철에 수박 서리며 참외 서리하던 일이다. 예로부터 우리 농촌공동체에는 아주 독특한 ‘서리문화’가 있었다. 아이들이 남의 밭이나 집에 들어가 먹을 것을 훔쳐다 먹는 장난이 그것인데, 기껏 아이들 장난을 두고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좀 지나치다 싶으면 그냥 풍습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풍습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것은 좀 지나치게 ‘문화’로 대접 받을 만한 나름의 까닭이 있다.
우선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내 것’과 ‘네 것’을 그리 절박하게 따지지 말자는 것을 일깨워 주는 구실을 하였다. 우리네 농촌처럼 규모가 작고 소박한 마을공동체에서는 칼로 무 자르듯 하는 ‘소유의 질서’가 통하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끈끈한 유대와 일체감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 생각이 이웃 농사도 ‘남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것 중 하나’라는 눈으로 바라보게 하였고, 그것을 ‘서리’라는 풍습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좀 거창한 풀이가 된 것 같지만, 어쨌든 서리는 공동체 정서가 너그럽게 받아들인 풍습이었다. 이를테면 몇몇 아이들이 밤중에 남의 수박 밭에 들어가서 수박서리를 하다가 주인에게 들켰다고 하자. 이 때 만약 주인이 아이들을 지나치게 혼내 주기라도 하면, 눈총은 아이들보다는 주인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었다. 아이들 장난을 가지고 뭘 그리 야박하게 구느냐는 눈총이었다. 이런 정황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 있다. 적어도 내가 겪은 바로는 서리에도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첫째, 어떤 서리든지 먹을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보통 여름에는 수박 서리, 참외 서리, 복숭아 서리를 비롯해서 밀 서리, 콩 서리, 오이 서리가 주종을 이루는데, 이것은 대개 밭에서 자라는 것이다. 가을에는 사과 서리, 배 서리, 감 서리가 제격이었고 겨울에는 무(김장용으로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놓은 것) 서리가 흔했고, 가끔 곶감 서리나 달걀 서리도 양념으로 곁들였으니, 이는 대개 집안에 갈무리해 놓은 것들이다. 둘째, 반드시 알맞게 먹을 만큼만 가져와야 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먹고도 남아 버릴 만큼 가져와서는 안 된다. 혹 서리꾼 가운데 욕심을 내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다른 아이들로부터 타박을 받게 마련이었다. 셋째, 모쪼록 먹을 것만 취해야지, 결코 밭이나 울타리를 망쳐서는 안 된다. 넷째, 서리꾼 가운데 주인집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밭이나 집에 들지 않고 밖에서 망을 본다. 다섯째, 주인에게 들키면 모두들 재빨리 도망가되, 망보는 아이는 일부러 꾸물대다가 붙잡혀도 좋다.
먹을 것만을 대상으로 한 것과 꼭 알맞게 먹을 만큼만 가지는 것은 서리가 결코 도둑질이 아님을 말해 준다. 밭에 심은 것을 서리할 때 밭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매우 엄격한 원칙이었다. 원두막 영감님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그깟 과일 몇 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여 철없는 아이들이 밭을 마구 휘저어 미처 익지 않은 과일까지 결딴낼까 하는 것이었다. 능숙한 서리꾼은 결코 밭이나 울타리를 망치지 않았다. 주인집 아이가 망을 보고, 혹 들키더라도 망보는 아이가 잡히도록 한 것은 얼마나 기지 넘치는 계고인가. “네 이놈들, 게 섰거라!” 하고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원두막 영감님이 꾸물대는 아이 목덜미를 낚아채 보면 십중팔구 영감님 맏손자였으니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영감님도 그 정도쯤이야 미리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서리꾼은 잡을 생각 말고 쫓을 궁리하라’는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원두막 영감님도 애초에 잡을 생각이었으면 살금살금 소리 없이 다가왔지, “게 섰거라!”하고 벼락같이 소리 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래서 나는 감히 서리를 문화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옛날 농사꾼들 고단한 삶 속에서 감칠맛 나는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였고, 질박한 마을공동체 안에서 질긴 유대감을 심어 주었으며, 놀이와 모험을 즐기는 아이들에게 신나는 놀이마당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런 서리문화가 사라지고 없다. 농촌공동체가 무너지고 산골 구석구석까지 도시의 각박함이 스며든 까닭이다. 골골마다 ‘소유의 질서’가 사람들 삶을 지배하니 오로지 ‘내 것’과 ‘네 것’이 있을 뿐, ‘우리 것’은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실망은 이르다. 비록 서리 같은 넉넉한 풍습은 사라졌으되, 우리네 농촌 인심은 아직 그 온기를 다 잃어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늦가을이 되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까치밥이 그 본보기가 된다. 찬바람이 불고 감이 빨갛게 익으면 너도나도 감을 따는데, 낮은 곳에 달린 것은 손으로 따고 높은 곳에 달린 것은 장대로 딴다. 그러다가 가장 높은 곳에 달린 감 몇 개는 따지 않고 그냥 둔다. 겨우내 먹을 것을 얻는데 어려움을 겪을 새들을 위해서다. 그래서 그 이름도 까치밥이다. 말만 들어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대목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