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존 비밀
김상화(인천 임학중학교 교사)
휴일에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한 드라마에서 이런 명대사를 발견하였습니다.
“겉이 연한 조직으로 둘러싸인 생물은 이 연한 부분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 내부에 있는 중요한 장기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그러나 겉이 딱딱한 갑각류 같은 생물은 보기에는 강해 보이지만 일단 겉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이 상하면 회복하지 못하고 그걸로 끝이다.”
2009년에 인천의 한 중학교에 영어 교사로 처음 부임한 병아리 교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생존의 비밀이 바로 이건가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고 살기 마련이지만,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고 작은 상처가 마를 날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맨손으로 집안 청소를 하고 나면 어디서 다쳤는지 손에 베인 상처가 생겨 일회용 밴드로 싸매기가 일쑤입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긴장이 풀린 몸을 침대에 누이고 나면 이러저러한 일이 생각나 눈물로 베개를 적시다 잠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 같은 보통의 인간도 한동안 텔레비전 드라마에 멋있게 등장하던 외계인 주인공 남자처럼 몇 시간 혹은 주말 동안 죽은 듯이 자고 나면 깊은 상처와 충격에서 웬만큼 회복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그 다음 날이면 또 지팡이를 떨쳐 짚고 아파트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잘 외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내가 어느 날 교실 곳곳에서 떠들고 있는 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야단을 치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도대체 아부할 줄 모르는 뻣뻣한 내 성격도 바뀌는 날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맨날 나만 미워하는 것 같은 부장선생님이 넘어지셔서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으셨다는 소식에 내가 처방받았던 좋은 연고를 가지고 가서 조공으로 바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맹인인데다 교직 경력이 짧아 늘 다른 선생님에 비해 부족한 내게도 쥐구멍에 볕들 날이 찾아옵니다. 2013년에 ‘성취 평가제’라는 낯선 제도가 도입되면서, 선배 교사들이 내가 출제한 몇몇 문제가 창의적이라고 칭찬하는 언어도단적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무한 인내의 투쟁을 모두 쓸어가 버리는 지구 종말 수준의 홍수 사태가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오기도 합니다. 위에 늘어놓은 소소한 자기 자랑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처참하고 끔찍하기 때문에 차마 솔직하게 글로 옮기지는 못함을 독자들은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의지력을 짜내서 헤엄을 쳐서 일단 구명보트에 올라 기다리면 물 빠진 맨 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눈을 반짝이면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학생들입니다. 말을 안 듣고 생떼를 부리고 공부를 못하거나 안 해도 그들은 내 제자이고 내 새끼들입니다. 흔히 부모들은, 특히 엄마들은 자식을 보면서 힘든 삶을 지탱할 힘을 얻는다고 하지요. 자식을 낳거나 키워 보지는 못했지만 그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어디에 살건 거기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 기대어 살 때 가장 안정적으로 살아집니다. 인간이 돈이나 술 같은 것에 기대어 살 때 부작용이 납니다. 내가 그럴만한 사람들에게 기대고 또 내가 기대어 살만한 사람이 되어 준다면 정말 살만한 인생이겠습니다. 이것이 독립심을 부르짖으면서 살아온 내 삶에 찾아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입니다.
